20250511 다해 부활4주일
사도 9:36-43 / 묵시
7:9-17 / 요한 10:22-30
부활을 믿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이 3번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기적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 마태오(9:18-26), 마르코(5:21-43), 루가(8:40-56)에서 모두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자기 딸이 곧 죽게 되었다고 빨리 오셔서 낫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일행은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가는 중에 하혈병
걸린 여인을 낫게 하는 일이 생기는 등 시간이 좀 지체됩니다. 그 사이에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뒤늦게 도착하신 예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소녀야, 일어나라”라는 뜻인 아람어 “탈리타
쿰”이라고 말하며 그녀를 살리십니다.
또다른 기적은 루가 복음(7:11-17)에만 있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타 지방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1열왕 17:8-24)와 매우 흡사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보잘껏 없는 과부와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을 잃은 불쌍함을 측은히
여기는 주님의 자비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번째 소생기적은 요한복음(11:1-44)에만 나오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앞서 언급한 두 기적과 다른 점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어서 시신이 부패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단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넘어 예수님 스스로가 부활과 생명임을 계시하십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건으로 큰 위기를
느낀 유대 지도층들은 예수님을 반드시 죽여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후 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소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탄생한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소생기적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이 증언한 이 기적과 복음서에서 증언한 소생기적 모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기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사도로서의 영적 권위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은 회당장의
딸에게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명하신 것처럼, 베드로 역시 “다비타, 일어나시오”라고 말함으로써 스승의 행동을 따라 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이 유다 지방이 아닌 요빠라는 이방지역에서 일어났고, 이를
목격한 이방인들도 주님을 믿게 됨으로써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퍼져 나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기적을 행한 사람은 다름아닌 베드로입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요한 13:37)라고 호언장담했다가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나약한 인간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베드로가 여러가지 기적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요? 무엇이 그토록
허세를 부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 닥쳤을 때 비겁하고 나약했던 그를 변화시킨 걸까요?
우선 베드로의 인생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치명적인 사건이자 어쩌면 커다란 트라우마(trauma)인 십자가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상처’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 트라우마(τραῦμα)에서 유래된 이 말은 정신의학에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고 합니다. 이것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이나 위협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그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장애를 말합니다. 예컨대, 충격적 사건을 겪은 사람은
그런 일이 또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 있습니다. 또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유사한 이미지와
환경에 노출되면 똑같은 강도(强度)를 가진 공포심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된 심리상태에 대한 방어기제로 무기력증이나 둔감화 등으로 회피 내지
마비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한밤중에 예상치 못하게 스승이 체포되고, 다음날 십자가라는 극형에 처형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그들은 엄청난 트라우마를 받았을 겁니다.
그 와중에도 베드로는 갑자기 잡혀간 스승이 어찌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사제들이 모인 산헤드린(Sanhedrin) 마당에 몰래 숨어들어가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불을 쬐고 있는 틈에 끼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사람 말투를 의심한 사람들이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가 아닌가 추궁하자, 겁이 난 그는 아니라고 잡아떼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성서는
그 때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예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이 떠올라 땅에 쓰러져 슬피 울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 15: 66-72 참조) 이 사건으로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그 부르심에 응해 열과 성을 다하여 추종했던 자신의 모든
신념과 열정이 한 순간에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한심하고 형편없는 놈이라는 심한
자기 환멸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열정과 희망이 사그라들고 회색 재로 변해버린 마음을 안고 베드로는
고향 갈릴리로 내려가 다시 고깃배를 탔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 21장은 희망이 사라진, 그래서 내적으로 죽어 있는 베드로를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잡히시던 그날 밤 장면과 비슷한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 베드로가 숯불을
쬐고 있던 병사들 사이로 들어갔다면,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베드로를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또한 그날 밤 주변사람들이 3번에 걸쳐 베드로에게 “너도 그의 제자냐?”고 추궁했다면,
예수님은 3차례에 걸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저는 예수께서 트라우마로 고통속에
있는 베드로를 트라우마가 발생한 그 때로 다시 돌아가 치유해주신 거라고 봅니다. 거기서 베드로가 상처입고
망가진 과거가 다시 떠오를 때, 예수께서는 사랑으로 이를 치유하고 구원하십니다. 이로서 죽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시 소생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나를 따라라”(요한 21:19)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온전히 응답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주님의 사도로 변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현대인들은 ‘과학적 증거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이 예수께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종교에서 전하는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믿음’은 단순히 과학적 증거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설교에서 언급한 베드로와 같이 개인의 체험과 그 증언을 통해 형성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주님의 양들이 됩니다. 이제
부활신앙은 단순히 예수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신앙은
예수가 성령의 능력으로 지금도 이 세상에서, 특히 우리 신앙인들의 삶을 통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삶의 모든 체험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활동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삶이 변화될 때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부활신앙은 더 깊어집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자신의 죄성(罪性)이 철저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해 그 사랑으로 그는 다시 생명을 얻고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죽은 다비타를 살렸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은
트라우마로 시달리는 우리를 치유하고 다시 생명력을 갖게 해 줍니다. 그러나 이 신앙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우정이 없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다(Nemo nisi per amicitiam cognoscitur)”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누군가를 진실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눈이 있어야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랑의 눈이 없다면, 우리는
복음에서 들은 유대인처럼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요한 10:23)라고 말하면서 불편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그 부활이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것을
믿고 희망합니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죽음에서 건져 주시는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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