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8 다해 부활5주일 사도 11:1-18 / 묵시
21:1-6 / 요한 13:31-35 부활한 사람들의 삶 “뒤돌아보니
은총이었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연로하신 신앙인들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이 말을 종종 하십니다. 젊었을 때 저는 이 말을 들으면 신앙인이니까
으레 하는 인사말이려니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니 이 말이 주는 의미를 점점 공감하고 있습니다. 부활시기 동안, 우리는 매 주일 예배 때 요한복음을 듣습니다.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은 4개 복음 중에서 제일 늦게 씌어진 책입니다. 그래서 앞서 씌어진 3복음서에 비해서 사색의 흔적이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한복음의 머리말이라고 할 수 있는 1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마치 창세기 1장을 보는 것처럼 공간적으로는 우주적 차원을 넘어서고, 시간적으로는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 태고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입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저자가 웅장하고 장구한 ‘빅 히스토리(Big history)’를 서술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체험하고, 이어서 성령의
임재로 탄생한 교회와 그 공동체가 퍼져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러한 일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신앙의 신비와 삶의 참된 가치를 깨달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 물리적으로 예수님이 부재(不在)한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예수가 누구이며, 그분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이
어떤 건지 본을 제시하려고 이 책을 썼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복음이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연대기적으로 예수님의 활동을 묘사하기 보다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시점에서 예수생애의 전 과정을 회고하며 새롭게 이해하면서
그린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요한복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포이자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성령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요한에게 깊은 신학적 영감을 불어넣어준 성령의 역사(役事)란 뭔가요? 오늘 제1독서는
대표적인 성령의 역사하심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선교보고를 합니다. 그는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몇몇 신자들이 “왜 당신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었습니까?”(사도 11:3) 하고 따집니다. 그들은 비록 세례를 받았지만, 그들의 의식은 여전히 유대교 관습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비난에 대하여 베드로는 자신이 겪었던 신앙체험을 간증합니다. 그것은 그가 기도할 때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시였습니다. 환시 중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먹으라고 하늘에서 음식을 내려 보내주십니다. 그런데 그 음식은 유대교 규정 상 먹으면 안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거부하자, 하늘로부터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1:9)라는 음성이 3차례나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요빠라는 이방지역에 사는
이방인 고르넬리오 집안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싶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베드로의 내면에 “망설이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거라”(사도 11:12)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고르넬리오 집에 가서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자 예루살렘교회와 똑 같은 성령이 임재하심을 목격합니다. 이
모든 일을 겪은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유다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역사(役事)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일을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유다인 신자들에게 전하면서 교회가 나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증언합니다. 위와 같은 사건을 통해 이제 교회는 유대인들만의 교회에서 온 세상 만민을 위한 교회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요한복음이 써진 교회공동체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예전에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 일부분입니다. 특히,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목전에 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말씀의 앞부분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고별말씀이 없습니다. 대신에 세 복음서 모두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한 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 (요한 13: 31) 라는 말씀으로 인간 예수가 아닌 하느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후대에 씌어진 요한복음이 사건자체보다는
사건 너머에 있는 의미를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약 100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이 흐르면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곧
오시기로 약속하신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올 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소수’의 교회를 둘러싼 ‘다수’의
세상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미워하기까지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했으며, 이 믿음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부활과 재림 사이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저자가 보기에 세상의 미움을 받는 그들의 운명은 예수님의 운명과도 유사합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의 운명을 기억함으로써 신자들이 처한 상황을 새롭게 이해하고, 우울에서 벗어나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이들도 이 승리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인 묵시록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묵시 21:5) 그러면 낡은 것을 허물고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의 표징인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4-35) 사실,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계명이 새 계명인 이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사랑, 불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한결 같은 사랑,
순수한 사랑, 다함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자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며, 그것은 사랑 말고는 그 어느
것도 합당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운데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 모상(Image of God)’이라는 우리의 모습자체가
뒤틀려지게 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가롯 유다가 나가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별말씀을 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했지만, 이 사랑의 계명 그리고 이 계명이 담고 있는 하느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한국교회들은 ‘영광의 주님’, ‘승리자 그리스도’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광과 승리는 십자가 없이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면, 생길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
사랑은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완전하면서도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이 이제 자신을 희생하셔서 우리를 구해 내셨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묵시록 저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묵시 21:3-4) 이것이 바로 부활한 사람들의 삶이며, 이것이 바로 부활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를 십자가와 부활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