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0713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다해 연중15주일)
작성일 : 2025-07-13       클릭 : 2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0713 다해 연중15주일

아모 7:7-17 / 골로 1:1-14 / 루가 10:25-37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래 사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바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불로불사(不老不死)를 위하여 별의별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애썼던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도 진시황제를 떠올릴 것입니다. 기원전 259 13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기원전 221년 중국 최초로 통일제국을 수립하고 진()나라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고, 자신은 이 왕조의 처음을 열었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로 개칭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진시황제를 중국역사에선 시황제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세상을 다 가진 그였으나 늙어 기력이 떨어지자 그는 영원불멸한 삶을 갈망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러한 비법을 찾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서복(徐福)이라는 신하에게 젊은 남녀 수천명을 대동하고 신선과 불로장생약을 찾아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서복은 시황제의 명을 따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대만과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며 불로장생약을 찾았지만, 결국 못 찾았고 처벌될 것이 두려워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제주도 남단에 있는 서귀포(西歸浦)’라는 도시이름이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는 뜻으로 그의 행적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불로장생에 집착한 시황제였지만, 불행히도 50세 나이에 세상에 떠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대목을 들었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0:25)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가 질문한 의도가 참 고약합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속을 떠보려고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유혹하려고혹은 시험하려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단식하며 기도하실 때,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하고 유혹한 그 단어와 똑같습니다. 따라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의도로 질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오늘 들은 이 곳에만 있지 않습니다. 루가 복음 18 1절에도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루가 10:26)라고 반문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율법의 내용과 그 해석에 대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전문가 답게 정확한 대답을 합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고, 그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시험할 의도로 질문했던 율법학자는 신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자, 이제 방향을 바꿔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합니다. 루가 복음 저자는 이를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루가 10:29)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가 10:29)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몇 주전 설교 때 그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으므로 이번 설교에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비유에서 왜 예리고라는 지명이 나왔는지에 대해선 간단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예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오아시스 도시로 예루살렘 성전에 봉사하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이 많아서 주민들이 많이 살았고 상업도 발달한 곳입니다. 지형적으로도 예루살렘은 해발 762미터나 되는 고원에 있지만, 예리고는 해저 258미터로 해면보다 낮은 곳에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루가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간다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이 비유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나 다친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같은 동족인 사제와 레위인은 그를 피해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불행을 당한 유대인을 도와준 이는 엉뚱하게도 그들이 극도로 혐오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는 물질적으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사랑을 베풉니다. 비유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제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이웃이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만일 우리라면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했을 법한데, 그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루가 10:37)라고 대답함으로써 끝까지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회피합니다. 그의 말을 통해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개인이건 집단이건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적지 않은 경계를 설정합니다. 경계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를 보호해주고, 우리가 누구인지 하는 정체성을 규정해 줍니다. 인간은 경계를 가짐으로써 내가 나다워지고, 우리가 우리다워집니다. 경계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의 존재조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스스로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는 너와 관계하고, 우리는 너희와 관계하며 살아가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계성과 독자성은 얼핏 다른 것 같지만, 뗄래야 뗄 수 없는 우리의 본질적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계는 이 둘 간에 존재하면서 때론 연결하기도 하고, 때론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경계를 절대화하고 고정시키는 경우입니다.

오늘 제1독서 남 유다 왕국 출신 아모스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북 이스라엘 왕국으로 가서 예언자 사명을 했을 때, 그는 북 이스라엘 지배층으로부터 완강한 저항을 받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사제는 아모스에게 당장 여기를 떠나 유다 나라로 사라져라. 거기 가서나 예언자 노릇을 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 여기는 왕의 성소요 왕실 성전이다.”(아모 7:12-13)라고 비난합니다. 이것은 왜 북쪽 이스라엘의 일을 남쪽사람이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냐는 힐난이며, 자신들만의 벽을 높이 치고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대표적인 언사입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의 이러한 폐쇄적 태도는 종국에 가서는 왕조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통해 우리는 사랑과 정의는 때론 경계를 넘어야 함을 배웁니다. 경계를 넘을 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담은 허물어지고, 두 지역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우는 이웃이 됩니다. 경계를 넘을 때, 남 유다 왕국과 북 이스라엘은 서로의 장벽이 허물어져서 그전까지 갈라져서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는 관계를 청산하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 시나이산에서 야훼 하느님과 계약 맺은 하나된 민족으로 복원됩니다. 이처럼 경계를 넘는다는 것을 파편화되고 원자화 된 우리의 모습을 극복하고 더 넓고 더 위대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그 내적 힘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것도 율법학자처럼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처럼 실천이 동반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 눈으로 보여주신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당신의 경계를 넘어서 인간에게 오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느끼고, 변화된 사람들의 증언을 간직해 오면서, 오늘날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고 노력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력은 율법학자처럼 그 사랑을 올바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올바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자신의 경계를 넘어 확장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확장은 마침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영원한 삶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이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늘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은 내가 숨쉬며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 그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지상에서부터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에서부터 내가 설정한 경계를 넘어 사랑의 영역을 넓혀 나갑시다. 이렇게 내가 담쌓고 있는 이웃들과, 세상들과 거리를 좁혀 나갈 때 우리 각자는 하느님과의 거리도 좁혀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조금씩 조금씩 나에게 다가오셔서, 마침내 나의 손을 잡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나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비법을 알려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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