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0720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다해 연중1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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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베드로  

20250720 다해 연중15주일

아모 8:1-12/ 골로 1:15-28 / 루가 10:38-4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을 할 때, “명분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욕구나 필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고, 논리적으로 타당하며,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명분이 없다"라는 것은 곧 어떤 행동이나 주장에 있어서 위의 요소들이 결여되어, 타인에게 설득력이 없거나 비난받을 소지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명분(名分)’이란 뭔가요? 이 말은 이름과 명칭, 신분을 뜻하는 ()’과 직분과 역할 그리고 의무를 뜻하는 ()’이 결합한 말로서, 각자의 이름에 합당한 역할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기원은 논어(論語)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거기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하루는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臣臣父父子子)" 이 구절은 공자의 정명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공자는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행위를 할 때 비로소 질서가 잡히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인들에게 있어서, '명분'은 개인의 윤리적 삶에서부터 사회, 정치, 외교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행위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부여하는 핵심적인 가치이자 판단 기준이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북이스라엘의 사회적 혼란에 대한 아모스의 비판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그리고 동생 마리아를 탓하고 있는 언니 마르타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모스가 비판한 북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남 유다 출신 예언자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서 횡행(橫行)하고 있는 경제적 탐욕과 부정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합니다. 동아시아인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명분이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아모스에게 있어서 명분의 근거는 뭔가요? 그것은 히브리인들을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고 하느님 백성인 자유인으로 계약맺은 정신입니다. 아모스는 이 근본정신을 망각한 북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아모 8:11) 이처럼 야훼 하느님이 주신 참다운 명분인 계명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따르고 있는 북 이스라엘에게 아모스 예언자는 머지않아 그 끝을 보게 될 거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의 정명 사상에 근거한 윤리와 유대-그리스도교의 윤리 핵심 간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자의 윤리는 이 세상 안에서의 윤리, 즉 내재적 윤리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것의 궁극적 근거가 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유가사상가들은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연의 질서라고 말합니다. 그에 반해, 유대-그리스도교의 윤리는 이 세상 밖으로부터 온 윤리, 즉 초월적 윤리입니다. 오늘 1 독서에서 봤듯이, 아모스 예언자가 왕이 왕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다고 하는 비판의 근거는 참다운 왕이신 하느님이라는 절대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교는 비록 이 세상의 상황과 가치를 존중하고 고려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의 절대적 관계에 뿌리를 둡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상황윤리를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할 힘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바로 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아라는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에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언니 마르타는 아마도 성격이 외향적이고 적극적이었나 봅니다. 그녀는 예수님 일행을 집으로 모시고 시중을 드느라 분주했습니다. 그에 반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언니가 은근히 화가 났나 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루가 10:40)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엉뚱하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루가 10:41-42)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아마도 어떤 분들은 마리아는 언니가 저리 바쁘게 일하는데도 어쩌면 그리 행동할까?’, 혹은 예수님은 열심히 일하는 마르타에게 칭찬을 못 해줄망정, 마리아를 일방적으로 편애하시는 건가?’라고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자연스러운 감정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을 좀 더 알게 되면 예수님께서 어떠한 의도로 말씀하신 건지 이해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 당시 사회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 여성은 토론하고 공부하는 자리에 감히 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마르타처럼 시중드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당돌하게도 마리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가 10:38)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위치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가히 혁명적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말씀을 배우는 일은 여자들에게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여자가 말씀을 배우는 일을 칭찬하셨다는 것은 그것을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언니 마르타는 물론이거니와 거기 있는 남성들에게도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것을 공자의 윤리적 시선으로 본다면 마리아의 행동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당시 사회의 자연 질서를 거스른 행동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가 여자답지 못한 행동이고, 예수님은 그것을 바로잡기는커녕 감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초월적 윤리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윤리 관념이 때때로 초월자이신 하느님 보시기에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강한 반발과 저항을 받을지라도, 초월적 윤리는 시대와 공간의 제약 속에 갇혀있는 우리의 관점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시선이라는 보다 넓은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은 교회는 때때로 세상의 기존 질서와 타협하면서 세상 가치에 야합하며 살기도 했지만, 초월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의 진리를 위해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띠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예언자의 사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예언자란 미래를 점쟁이처럼 미리 맞히는 자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진선미(眞善美)로부터 계시받은 정신을 이 세상 안에 선포하고 구현하도록 추동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명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하기 위해서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골로 1: 24-25)

오늘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갈등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모두 자국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위력을 휘두르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경제로, 외교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로 자신의 힘을 마구 휘두릅니다.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뜻을 지닌 중국몽(中國夢)’을 주창하면서 미국 못지않게 자신의 힘을 과시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 정치지도자들의 명분에 자국민들은 열광합니다. 그러나 설사 그 명분이 그 나라 국민에게 즐거움을 주고 자부심을 줄진 몰라도, 예언자적 사명을 이어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그것이 올바른 명분인지 식별해야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고(골로 1:20) 그 평화는 어떤 특정 민족, 특정 국가, 특정 집단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무한하신 선물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각종 명분과 구호에 열광할 때 쉽게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관념과 관습 등에 대해서도 그것이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인가 한 번 더 숙고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이 세상 안에서 성실히 살아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권고하십니다: “마르타, 마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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