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7 다해 연중17주일 호세 1:2-2:1 / 골로 2:6-19 / 루가 11:1-13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대하여 제가 강화읍교회에서 사목했을 때, 매일 한옥 성당 문을 열고 닫았습니다. 이 일은 역사적 유적을 방문하는 여행객들과 순례객들을 위한 강화성당의 중요한 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한옥 성당 입구에 있는 리플렛을 정리하며 방문한 사람들이 쓴 방명록도 읽고 그것을 쓴 사람들을 위해 잠시 기도하곤 했습니다. 방명록에 쓴 기도 의향 중 가장 많은 것은 가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걸 보면서 신을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중보기도가 가족을 위한 기도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절대자이신 신께 우리의 바람을 기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는 근원적으로 청원기도라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란 ‘원(願)’ 원하는 것을, 초월적 존재 또는 절대적 존재에게 ‘청(請)’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란 무엇인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잘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이 ‘주님의 기도’를 우리 기독교 기도의 표준으로 삼고 자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독교 기도의 핵심이 담긴 주의 기도와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를 보겠습니다. 4개의 복음서 중 주의 기도가 나오는 복음서는 오늘 들은 루가복음과 마태오 복음입니다. 두 복음서에 나타난 주의 기도문은 전반적으로 같습니다. 다만, 기도문이 약간 다릅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기독교의 핵심 기도문이라고 하면 기도문도 똑같아야지 문구가 왜 그리 다른가?”하고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쇄와 통신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이고, 2000년 전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기자들처럼 그 자리에서 받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구전(口傳)으로 전해졌고, 그 과정에서 각 지역 교회 공동체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다 보니, 표현에 있어서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약성경이 27권으로 확정되면서, 주의 기도문은 크게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에 나오는 주의 기도를 기반으로 공식 기도문이 확정되었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천주교와 기독교의 주의 기도문이 조금 틀립니다. 성공회를 비롯한 기독교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있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마태 6:13)라고 기도하지만, 천주교는 이 구절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루가복음 주기도문에는 이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표현상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신•구교 모두 같습니다. 주의 기도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하느님이 누구신가? 둘째는 하느님께 드리는 청이 뭔가? 셋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청이 무엇인가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마태오 복음은 아버지 앞에 “하늘에 계신 우리”(마태 6:9)라는 수식어를 붙이지만, 루가는 그런 표현 없이 그저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저는 마태오보다 루가복음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원래 기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어 성경에는 ‘아버지’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어는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압바(Abba)’입니다. 이 말이 갖고 있는 뉘앙스가 워낙 특이해서 언어에 유창한 사도 바울조차도 이 말의 느낌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가 힘들어서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그대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 ‘Abba’라는 이 말은 가히 혁명적인 신관(神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을 초월자, 절대자, 무한자, 그래서 유한하고 죄스러운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노예에서 구해내서 자유롭게 해 주었다고 믿는 유대인조차도 그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그저 ‘주님’( אדני ADONAI)’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런 분에게 예수님은 갓난아기가 막 말을 배울 때 하는 말, ‘아빠’라는 이 원초적인 말로써 하느님을 부릅니다. 아빠라는 이 호칭으로 인해, 창조주이시며 절대자이신 하느님은 나를 낳으시고 내가 막 말을 배워 ‘아빠’라는 이 말에 감격하고 어쩔 줄 모르는 다정한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신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가까운 분이 되십니다. 이 ‘아빠’라는 말로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를 낳았고, 그래서 너를 위해 뭐든지 희생할 너의 유일한 혈육이다”라는 가장 안전한 존재이자, 우리가 가장 확실히 믿고 의지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Abba’라는 호칭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신 예수님은 그러한 하느님의 나라,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나를 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시는 하느님의 돌봄과 다스림이 우리에게 오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럴 때 아빠의 영광 속에서 나는 더욱 안전하고 기쁘게 지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져올 진정한 기쁨이자 평화입니다. 그런 다음 주의 기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때때로 이웃과 다투기도 합니다. 그리고 악의 유혹에 걸려 넘어져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하듯이, 이러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켜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라는 기도의 모범을 가지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예수님은 귀찮게 구는 친구의 비유를 들어, 끊임없이 간청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 비유 이야기에서 세 명의 친구가 나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친구’, 그를 먹이기 위해 한밤중에 빵을 구하러 간 ‘친구’, 그리고 끈질긴 요구 때문에 그 청을 들어준 ‘친구’가 등장합니다. 이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은 악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곤경에 처한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곤경에 처한 자녀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실 리 없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꾸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우리와 관계는 필요 때문에 한두 번 만나는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 아빠와 아이처럼 천륜으로 맺어진 관계, 그래서 끝까지 함께 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루가 11: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우리의 아빠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제일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어 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느님이 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 즉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특별히, 초대교회 때 성령의 은사를 목격하고 체험한 루가복음 저자는 하느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 바로 ‘성령’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 성령은 태초부터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계셨고, 이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죄와, 악의 유혹과,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시고 하느님의 자녀로 온전히 변화시켜 주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한국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교단이 아닌 단일교회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가 있는 교회가 대한민국에 있을 정도로 하느님은 우리나라에 풍성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의 기도 정신에 비추어 봤을 때, 우리 사회는 성령의 열매가 잘 열려있는지 의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께 생선을 달라고 하면서 뱀을 원했고, 달걀을 달라고 하면서 전갈을 원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의 기도 정신에 따라 진정으로 일용할 양식인 생선과 달걀을 달라고 청했다면, 우리 사회가 빈부로 양극화되거나, 서로 용서하지 않고 증오로 인해 분열되어 있는 작금의 우리 모습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혹시 나만 생선과 달걀을 먹고 타인에게는 뱀과 전갈을 준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는데도 왜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서 여전히, 아니 오히려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아마도 기도하는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래전에 영성 심리학을 전공하신 신부님으로부터 강의 들었을 때, 신부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떤 학자가 제가 방금 언급했던 문제를 학위논문 주제로 삼고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는 적잖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도 하면서 그 원인을 탐구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나의 심리학적 차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숙한 사람은 하느님께 청원 기도를 하면서 주님이 베푸신 은총에 감사하고, 그 은혜와 깨달음을 자기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 미성숙한 사람은 청원 기도는 하지만, 주님이 베푸신 은총을 당연히 여기고, 그러한 주님을 따르기는커녕,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계속해서 주님께 복만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 학자는 그 차이를 ‘십자가’라는 단어로 구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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