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0817 두 개의 깃발(다해 연중20주일)
작성일 : 2025-08-17       클릭 : 7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0817 다해 연중20주일

예레23:23-29 / 히브11:29-12:2 / 루가12:49-56

 

 

두 개의 깃발

 

 

그리스도교의 영성훈련 전통중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훈련방법을 꼽으라면 성 이냐시오(St. Ignatius of Loyola)가 자신의 회심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쓴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을 들 수 있습니다. 원래 이 책은 예수회 수도자들의 영적 훈련을 위한 지침서였으나, 점차 천주교 안의 다른 수도자, 성직자, 신자들뿐만 아니라 여러 기독교 교단의 영성 훈련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피정을 통해서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립했으며, 그 안에 담긴 영적식별과 성찰과 기도방법은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여전히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입니다. 군인 출신이었던 이냐시오 성인은 당시 전투 장면을 빌어서 우리에게 드넓은 평원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진영을 상상해 보라고 초대합니다. 한쪽은 악마의 깃발 아래 뭉쳐있는 군대이고, 다른 한쪽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뭉쳐있는 군대입니다. 양 진영은 각각 서로의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보자면, 악마의 무기는 탐욕, 명예욕, 교만인데 악마는 이러한 무기를 통해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극대화하여 하느님과 이웃, 심지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나 자신의 선한 본성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무기는 자기비움, 섬기는 정신, 겸손입니다. 그리스도의 군대는 이러한 무기를 통해 하느님과 나를 연결하고, 나와 너를 연결하여 모두가 참된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할 때 우리는 평소와는 다른 예수님의 결기를 느낍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온유하고 다정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영신수련두 개의 깃발묵상에 등장하는 전사(戰士)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가12:49, 5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악마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이 세상을 되찾기 위해 깃발을 높이 들고 전진하는 장군의 사자후와도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구원과 평화는 그저 평온한 모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절한 싸움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그리스도 군대의 임무(mission)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한 예로 든 가정 내 갈등은 평화를 위한 싸움에서 우리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이 싸움은 나와 타인뿐만 아니라 내 내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느님 안에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기까지 내 내면에서부터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깃발 간에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면 나 혹은 우리가 두 개의 깃발 중 어느 깃발에 서 있으며 그 싸움은 언제, 또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뭔가요?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군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루가 12:54-56) 여기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군중들에게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즉 군중들이 날씨와 같은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민감해하면서도 시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둔감하다는 점에서 위선자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징조란 그리스말로 프로소폰(πρόσωπον)’인데 그 뜻은 얼굴을 뜻합니다. 또한 시대란 그리스말로 카이로스(καιρός)’인데 그것은 양적인 시간이 아닌 매우 중요한 를 뜻합니다. 루가복음 저자는 이 단어를 통해 얼굴을 보고 누군지 잘 분별하는 군중들이 정작 예수님의 활동으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 이 결정적인 얼굴, 결정적인 때를 못 알아보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얼굴과 때를 알아보는 것을 그리스도교 영성에선 영적식별(Discernment of spirits)’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식별이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생각, 감정, 욕망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온 것인지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영적식별은 개인의 내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식별로까지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우리가 악마의 깃발 아래 있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서 있게 함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주 우리는 성령과 함께라는 주제로 전()교인 수련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강화에 있는 박물관과 교회들을 방문하여 복음의 씨앗이 강화(江華)지역에 어떻게 뿌려졌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고 들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신앙 선조들과 현재를 사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굳건히 설 수 있는 결단의 시간이 되었길 바랍니다. 그런데 악마의 깃발 아래 서있건 아니면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서있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깃발 아래 서 있을 때는 그 진영에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충성이란 말을 분석해 보자면, ()은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는 것이고, ()은 내뱉은 말을 이룬다는 것이 결합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충성이란 내가 추종하기로 한 대상을 내 마음의 중심으로 삼고, 그의 지시를 이루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따르기로 한 대상에 대해서 나를 온전히 개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대상이 내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아서 그 뜻을 내 손과 발로 이어지는 행동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깃발 아래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충성스럽지 못한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 진영에 속한 군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충성입니다. 그래서 악마의 깃발 하에 있는 군인들에게는 탐욕과 명예욕과 교만을 자기 마음의 중심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깃발에 속한 군인들은 자기비움과 섬김과 겸손을 마음의 중심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리스도의 깃발보다는 악마의 깃발에 속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래야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남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고, 그래서 내가 더 우쭐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서 그리스도의 깃발에 속하면 자기 것이 없어질 수 있고, 그래서 내 맘대로 못 해서 결국 내가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생각은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힌 나머지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이익을 놓치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모두가 악마의 깃발 아래 서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신의 욕망에만 충성하도록 훈련된 군인들이 모든 것을 정복했다고 하면, 그들은 이제 누가 더 많은 전리품을 차지하느냐를 가지고 서로 싸우다 자멸할 것입니다. 결국, 다 멸망하고 맙니다. 그에 반해,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서 그 사명을 완수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평소 선함과 절제와 겸손으로 훈련된 병사들은 그 전리품을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선용(善用)할 것이고, 시간이 갈수록 그 나라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함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가치 그리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충성스러운 병사가 된다고 하면,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짐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이고 영적으로 점점 고독하고 메말라가는 현대의 모순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인 히브리서 저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용맹하게 싸운 신앙의 선조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을 승리로 이끄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 12:3)

이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굳세게 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비우시고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섬기신 겸손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마침내 당신의 오른편에 앉게 해 주시는 참된 명예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을 궁극적이고 영원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표를 향하여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하며 이 싸움을 해 나가시길 소망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서 치열하게 싸우셨던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바친 관대함을 구하는 기도로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관대함을 구하는 기도(A Prayer for Generosity)

 

사랑하올 주님,

저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르쳐 주소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대로 당신을 섬기게 하시며,

주고도 그 대가를 헤아리지 않게 하소서.

싸우되 상처를 개의치 않고,

수고하되 휴식을 구하지 않으며,

일하되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주님의 가장 거룩한 뜻을 따르고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아멘.

 

Dearest Lord,

Teach me to be generous.

Teach me to serve you as you deserve;

To give and not to count the cost,

To fight and not to heed the wounds,

To toil and not to seek for 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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