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4 다해 연중24주일 예레 4:11-12, 22-28 / 1디모 1:12-17 / 루가 15:1-10 상실과 혼돈의 시대에 ‘잃어버린 양과 은전’의 비유를 읽다 초창기 교회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던 분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또한 교회가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은 인쇄술과 통신 기술이 고도로 발전해서 통일성 있게 기록하고 보급할 수 있지만, 과거엔 그런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역마다 그리고 전하는 사람마다 강조점과 관점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예수님에 대한 기록과 해석들이 다양하게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성경과 교리에 대한 통일된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고, 마침내 4세기 무렵 오늘날 27권의 책으로 신약성경이 확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정경(κανών, canon)’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측량할 때 쓰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교회는 신앙과 교리의 기준으로 이 말을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27권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문서들이 모두 거짓된 것들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경화 되기 전까지 그 문서를 읽고, 기도했던 그 지역 교회공동체에게 중요한 신앙의 나침반 구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학을 공부할 때, 27권의 정경뿐만 아니라 정경으로 되지 못했지만, 초기 기독교 교회들에서 사용되었던 나머지 책들을 참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저는 오늘 우리가 들은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 이야기에 대하여 정경 문서인 루가복음과 마태오복음에 실린 것 외에 토마복음서에 수록된 것도 비교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세 복음서 모두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 대하여 기본 구도가 ‘잃음과 찾는 과정-되찾음에 대한 기쁨-하느님의 기쁨’ 순으로 엮여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조점은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먼저, 도마복음은 잃은 양이 가장 덩치가 큰 양이고, 그래서 목자는 이 양을 많이 사랑했기에 다른 양들을 놔두고서라도 그 양을 찾아 나선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양적 기준이 아닌 질적 기준 즉, 그 양의 ‘가치’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마태오 복음은 이 비유를 교회공동체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교회공동체가 신자들을 잃어버렸을 때, 달리 표현하자면 그 양이 길을 잘못 들어 곁길로 빠져들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면 되찾아와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들은 루가복음은 교회론적 관점과 달리 예수님이 왜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인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구원론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루가복음이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연달아 소개한 이유는 잃음과 되찾음을 밀접하게 연결함으로써 회개와 구원의 기쁨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점을 역설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는 이 비유를 듣고, 기도하고, 해석하고, 전달한 공동체들이 처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는 프리즘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2025년을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이 비유를 읽는다면 어떻게 재해석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세상은 세계화(globalization)로 표현될 정도로 산업과 물류, 사람과 정보가 거미줄처럼 연결되고 서로 의지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둠이란 서구 선진국들은 제조업 등과 같이 노동의 수고가 들어가는 산업을 중국이나 한국, 인도, 동남아 등과 같은 곳으로 전가하고, 자신들은 금융 등과 같은 3차 산업으로 이를 통제하면서 세계의 소비자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반면에 비서구권들은 제조업을 통해 근면하게 일해서 세계의 공장으로 부(富)를 일궜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서구 선진국들은 제조업이란 양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양이 없다면 금융이나 군사력이란 양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목장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이웃 목장들에 있는 제조업이란 살찐 양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 목자에게 우리 목장과 거래를 하려면 그 양을 우리에게 넘겨줘야 한다고 이런저런 수단으로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그 양을 넘겨주지 않으면 양들을 초원에 데리고 나와 풀을 먹일 때, 우리는 개들을 풀어서 너희 양들이 초원에 얼씬도 못 하게 막을 거라고 겁박합니다. 자,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여러분이 목장 주인이라면 어떻게 대처하실 겁니까? 또, 은전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어떤 마을에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갖고 있는 일부 돈을 잃어버려서 재산 손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재산을 보충하기 위하여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는 대신에 마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이런저런 구실을 들어 자기에게 돈을 낼 수밖에 없게 만든다고 합시다. 마을 사람들은 “저 부자는 왜 자기가 제대로 못 해서 손해봐놓고 우리 것을 뺏으려고 하지”하며 볼멘소리를 할 겁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과 은전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 전제는 단지 한 목장, 한 집안을 배경으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날 거미줄처럼 연결된 세계화 시대에 마태오, 루가, 토마와 같은 저자들이 이 비유를 ‘삶의 자리’에 적용해서 해석한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었습니다. 저는 그 속에서 성경의 두 구절에 눈이 와닿았습니다. 하나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루가 15:1)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져볼 것이다.”(루가 15:8)라는 말씀입니다. 전자는 ‘개방성’을 뜻하는 것이고, 후자는 ‘내적 노력’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장을 세우시는 데, 차별과 닫힘보다는 포용과 열림을 택하셨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 당시 유대교는 그들의 목장에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사람, 남성, 유다 혈통들만 들어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식한 사람,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 여성, 이방인들은 목장 바깥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목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유대인들의 목장보다 양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목장, 즉 교회가 가진 개방성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보편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거기에는 성별, 인종,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는 열려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복음화된 사회는 이렇게 해야, 사회가 건강해지고 튼튼해 집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은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은전을 잃어버린 여자는 그것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는 수고를 감내해서 마침내 은전을 찾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은전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그 집안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개인에 적용해 보자면, 우선 자신이 갖고 있는 내적 역량을 찾는 것입니다. 교회에 적용해 보자면, 교회공동체의 내실을 기하는 것입니다. 사회에 적용해 보자면, 그 사회가 갖고 있다가 잃어버린 참된 가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국제사회에 적용해 보자면, 남의 떡이 좋아 보인다고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과시해서 뺏으려는 손쉬운 방법을 하려는 유혹을 이기고, 예수님처럼 자신보다 못난 이웃들을 친구로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자세와 더불어, 자신들이 잃어버린 가치를 열심히 복구하려는 희생과 노력을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잃어버렸던 자신의 과거와 되찾은 자신의 현재를 비교해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와같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1디모 1:13, 15-16) 앞서 복음이 목자의 관점에서 잃어버린 양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면, 오늘 제2독서는 사도 바울의 간증을 통해 양의 관점에서 상실된 상태와 회복된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때론 목자의 처지에서, 때론 양의 처지에서 상실과 회복을 바라보고 실천합니다. 목자의 입장에 설 때, 우리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로 상징되는 나쁜 목자처럼 목장을 관리할지, 아니면 예수님처럼 착한 목자처럼 목장을 돌보야 할지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더 확장하자면, 정글 같은 국제정치에서도 그 근본원리는 같다고 봅니다. 반대로 우리가 양의 입장이라면 목장을 떠나 길을 잃어버렸을 때, 그리고 목자를 만나 구조되어 목장으로 돌아왔을 때,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성찰하고 회복의 기쁨을 간증하고 유지하길 희망합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사회 각 영역에서 목장의 울타리들이 흔들리는 혼돈의 시대를 겪으며 살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때론 울타리가 흔들려 양들이 흩어져 크나큰 상실감에 빠지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타리를 복구하고 잃어버린 양들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때론 그 과정을 수행하는 목자로서 임무를 감당하기도 하고, 때론 내적으로 나 자신이 길 잃은 양과 같은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며 사도 바울의 간증에 위로받고, 예수님의 비유 말씀으로 삶의 지혜를 배우길 바랍니다.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 자신의 문을 열어주시고, 그 양들을 찾기 위해 지금도 온 힘을 다해 우리와 함께 수고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