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19 다해 연중 29주일 예레 31:27-34 / 2디모 3:14-4:5 / 루가 18:1-8 과부의 기도, 우리의 기도 요즘 서점에 가 보면 내년도 우리 사회의 주요 흐름에 대한 책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2026트렌드 코리아》, 《2026트렌드 노트》라는 책을 통해 우리는 내년도 흐름이 어떻게 될지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교회 트렌드2026》이라는 책을 통해서 내년도 한국교회의 흐름도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국내외적으로 제반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불확실성이 증가하다 보니, 사람들은 이러한 책을 통해 그러한 변동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싶어하는 불안심리와, 동시에 미리 그 변화에 잘 대처해서 안정을 찾고 싶어 하는 심리가 공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 《2026트렌드 노트》라는 책을 대충 훑어봤는데, 거기서 제 시선을 사로잡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최근 몇 년 동안 SNS상에서 많이 회자되는 키워드들에 대한 통계분석이었습니다. 키워드 중에서 ‘불안감’, ‘피로감’ 그리고 ‘안정감’이란 단어 빈도수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치, 경제, 산업환경이 요동치면서 사람들은 앞으로 자신들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불안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AI와 같은 신기술이 쉴 새 없이 등장하면서 시대에 낙오되지 않기 위하여 애쓰는 것에 대한 피로도 심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뭔가 나를 안심시켜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안정희구도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교회에도 투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 트렌드2026》에도 사람들이 교회 출석률은 줄어들고 있지만, 점이나 무속을 찾는 비율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Homo Spritualis(영적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이 발달해도 이것이 인간의 영적 갈망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책은 향후 나타날 교회 트렌드 중 하나로 ‘Simple Church’를 예측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에 충실한 ‘단순한 교회’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본질인 신앙! 그중에서도 신앙을 지켜나가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예배도 중요하고, 성경과 교리 공부도 중요하고, 전도와 교회사목과 행정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러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지탱해 주는 것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 인간은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동시에 영적이고 물질적인 것의 근원인 신(神)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이 유지되어야 신앙인은 신앙인이 되고,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쉬우면서도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면서도 쉽게 잡히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더욱이, 불확실하고 그래서 때때로 미래가 불안한 가운데 기도한다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와 재판관’ 비유는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저자는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앞부분에서 종말이 올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언급한 후, ‘과부와 재판관’ 비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형성된 초대교회 공동체들이 처음에는 성령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이상한 언어를 비롯하여 치유 기적과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일어나며 활발하게 퍼져나가다가, 외부로부터는 박해와 핍박이 시작되고, 내부적으로는 곧 재림하시기로 한 예수님의 종말 예언이 실현되지 않자, 신도들의 믿음과 열정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루가복음 저자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과부와 재판관’ 이야기를 전하면서 불안해진 상황 속에서 힘들어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메시지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종말을 앞두고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루가 18:1)”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이야기’를 시작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대개 율법 학자가 재판관으로 행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여러 차례 재판관을 찾아갔지만, 그는 그 사건을 다룰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과부는 약자의 상징입니다. 특별히, 고대사회에서 과부는 그중에서도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질 못하는 매우 불리한 신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마도 그녀는 마땅히 받아야 할 재산 아니면 갖고 있던 최소한의 재물마저도 친척들에게 갈취당하는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배경도 없고, 재판관에게 뒷돈을 찔러 줄 돈도 없는 과부는 재판관을 찾아가 억울함을 풀어주고 올바른 판결을 해달라고 끈질기게 간청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힘없는 약자의 상황은 사실 낯설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어서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반전이 생깁니다. 성서는 재판관의 속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루가 18:4-5)” 마침내 과부는 부당함과 불의로부터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승리했다고 재판관의 불의한 품성과 불의한 세상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재판관이 그녀의 권리를 찾아준 것은 그것이 공정하기 때문이라는 법의 정신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과부가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에 질려서 내린 결정입니다. 즉 재판관은 여전히 자신의 편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이상적인 나라,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더욱이 오늘 복음의 맨 마지막 8절에서 예수님은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라는 다소 비관적인 말씀으로 마무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제2독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오에게 한 당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디모데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67년 경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었을 때 쓴 거라고 합니다. 당시 사도바울의 상황은 상당히 암울했습니다. 아무도 법정에서 그를 변호해 주지도 않았고,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그라도 버림받았다는 고독감과 몰이해, 그리고 고문과 곧 집행될 사형 앞에서 심적으로 큰 시련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하느님과 깊은 유대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사랑하는 신앙의 아들 디모데오를 다시 보고 싶어 했고, 그에게 주님의 사명을 다시 한번 확고히 심어주려고 펜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디모데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는 순교를 앞둔 사도바울이 복음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그의 굳은 신앙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디모데오에게 권고합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것과 군림하실 것을 믿고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 그대는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그대의 사명을 완수하시오.(2디모 4:1, 5)”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초대교회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곧 재림하여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느님의 공의를 세워주실 것을 학수고대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곧 오시기로 약속하신 예수님의 재림은 지연되고,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많은 고통을 당하는 상황은 여전한 가운데, 신자들은 낙심하고 기도할 힘을 잃고 심지어 배교(背敎)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루가복음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교인들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과부처럼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를 받아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그리고 교회 역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교회 그리고 세상 역시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술의 발달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피로감은 쌓이고, 편리해진 기술이 역으로 내 일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를 불안과 두려움만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꾸준히 기도하기보다는 당장 내 마음에 안식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떤 심리적 위안거리를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합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느님과 연결될 때만이 불안함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한 번으로 혹은 갑자기 많이 기도했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한번 쓰고 버리는 습관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꾸준하게 기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고 한다는 것은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기도는 겉으로 보기에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은총은 내가 기도할 때부터 내 영혼 깊숙한 곳에 임재하십니다. 즉, 우리가 기도하는 처음부터 하느님은 이미 응답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루가 18: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과부의 청을 오랫동안 외면했던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다만, 이미 내 심령에 임재하시고 응답하신 하느님을 내가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과 상처들로 인해 하느님을 알아볼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의 퇴화한 영적 능력을 회복하고, 하느님과 연결을 튼튼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제 이 예배를 통해서 주님과의 연결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 이 연결이 우리 일상에서 꾸준하게 지속되는 기도로 이어지도록 노력합시다. 우리의 기도에 즉각 응답해 주시고, 기도 가운데 임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