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2 다해 연중31주일 하바 1:1-4, 2:1-4 / 2데살 1:1-4, 11-12 / 루가 19:1-10 용서받은 죄인 3주간에 걸쳐서
우리는 기도에 대한 복음말씀을 듣습니다. 지난 주일 복음을 다시한번 상기해 보겠습니다. 3주 전, 우리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비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마침내 재판에서 이긴 과부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희망을 잃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 복음인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기도할 때 남들과 비교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겸손한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겸손함 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교양을 갖춘 사람이 하는 그런 예의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가식 없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주님께서 측은하게 여기시고 용서하여 다시 당신 품에 안아달라는 호소입니다. 그럴 때 나는 주님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나도 주님처럼 변해갑니다. 그렇다면 주님처럼 변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들은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것 역시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오직 루가 복음에만
나오는 자료입니다. 루가는 이를 통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꾸준히
기도해야 하며, 그 기도는 상대를 비하하고 자신을 올리는 경쟁과 비교의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겸손의 기도여야 하고, 그리고
오늘 복음에 언급한 자캐오처럼 기도를 통해 새 사람이 되는 결실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럼, 오늘 복음인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두 분이 만난 장소인 예리고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예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오아시스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예루살렘이 해발 762미터나 되는 고원인데 반해서, 예리고는 해저 258미터로 기후가 온화하고 물이 많아서 살기가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해서, 아라비아 반도에서 오는 외국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세관이 있었으며, 동시에 강도가 자주 출몰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도에게 당한
사람을 돌본 착한 사마리아 비유에서도 예리고가 언급되었고, 오늘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의 직업이 세리였던
것도 이런 지리적 배경을 알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자캐오의 직업인 세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일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설교에서도 언급했듯이, 세리는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매국노 취급을 받는 죄스러운 직업이었습니다. 자캐오는 그런 세리 중에서도 고위층인
세관장이었으니, 아마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심한 소외감과 고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동시에
어렸을 적부터 배워온 종교적 가르침을 위배하고 있다는 심한 양심의 가책으로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제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봅시다. 아마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소문에는 그분이 가르치는 것이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이나 회당에서
바리사이들이 천편일률적이고 사람들을 단죄하는 방식과는 달리, 자신들과 같은 세리나 힘없는 과부들을 존중해
주시고,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신다 것에 신선한 깨달음과 놀라운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분이 예리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는 세관장이라는 사회적 체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처럼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이 누구인지 직접 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을 보자 그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저는 자캐오라고
합니다. 저, 여기 있어요!”라고
소리치지도 못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뭐야, 저 놈은! 감히 죄인인 세리녀석이 이곳이 어디라고 떠들고 난리야!”라는 사람들이 질타를 받을 것이 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가 19:5)라고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나의 속마음을
알아보시는 분이며, 그리고 그 소원에 먼저 손을 내미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하느님이 먼저 내 마음 깊은 곳에 오셔서 당신께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캐오를 부르신 것은 바로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는 하느님의 초대말씀입니다. 자캐오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기쁘게 응합니다. 지금껏
이스라엘 어느 사람에게도 이러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던 그였기에 그 감동은 참으로 컸습니다. 더욱이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고 큰 주목을 받고 계신 분으로부터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일행을 집으로 모시고 즐거운 식사를 한 다음, 다음과 같이 일생의 전환점이 될 엄청난 선언을 합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 (루가 19:8) 자캐오의
이 선언은 당시 양을 도둑질했을 경우에만 해당하는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율법에
의하면, 만약 남을 속여 재산상의 손해를 끼친 경우에는 손해 액수의 오 분의 일만 배상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이런 행동을 통해 “회개했다면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루가 3:8)라고 일갈했던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몸소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루가 19:9-10)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 구원을 얻었다”라고
말씀하신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란 내가 현세에서 공덕을 차곡차곡 쌓은 다음, 그 보상으로 내세에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예”하고 응답하고, 그 응답에 내 존재가 온전히 바뀌는 그 순간 구원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서 실현되어 갑니다. 하느님
그리스도가 사람 예수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이란 천상의 선물을 이 지상으로 가지고 왔듯이 말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를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나의 현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그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민족적으로는 배신자였고, 종교적으로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깊이 느끼고 있었기에, 양심의 갈등으로 힘들어했습니다. 자캐오의 내적갈등은 사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인간이 처한 실존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제 아무리 덕이 높고, 선한 삶을 산다고 자처하는 이들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은 실존적으로 모두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에
악에 노출된 연약하고 죄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러한 인간존재의 가벼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숨결에 지나지 않고 높다는 것도 실은 거짓말, 모두
합쳐 저울에 올려 놓아야 역시 숨결보다도 가볍다.” (시편 62:9) 이런 의미에서
세리가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가 19:13)라고 기도한 것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인간의 모습의 모범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께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이 죄스러운 한계상황은 하느님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자캐오의 집에 가시겠다고 하신 것은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앞에 응답합니다. 교회는 이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이
회개에는 방향전환과 달라진 삶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과 만나서 과거에 했던
것을 보상하고, 앞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제
그는 ‘용서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루가 복음 저자는 아마도 초기교회 공동체에서 자캐오라는 신자로부터 그가 예수로부터 어떻게 용서받았는지 증언을
듣고, 그것을 복음서에 남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루가는 ‘용서받은 죄인’ 자캐오의 증언을 소개하면서 신앙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답이란 한 마디로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표현안에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전, 즉 회심하기 전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만약 주님을 떠나면, 우리는
다시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한계성도 압니다. 이러한 우리를 주님은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서, 영원한 당신의 나라 식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놀라움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경배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바로 그 구원에 감사하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인 우리에게 무한한 은혜를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