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4 가해 대림3주일 이사 35:1-10 / 야고
5:7-10 / 마태 11:2-11 믿음과 희망을 찾는 생각하는 갈대 오늘 복음 말씀을 읽다가 예수께서 군중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태
11:7)라는 대목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로 연명하던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며 회개의 징표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줍니다. 요르단 강변에는 갈대들이 쭉 늘어서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갈대밭 사이 그늘에서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들으며 자신들의 삶을 뉘우치고 새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강에 들어가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강변에 있는 갈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세상의
유혹과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 사이에서 고뇌하는 자신들의 유약한 내면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년~1662년)이란 이름을 들어 보셨나요? 그는 당시 프랑스 학계에서 천재 수학자이자 과학자로 칭송을 받을 정도로 대단히 이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적 회심을 겪은 후, 그는 인간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기독교 진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남겼습니다. ‘생각들’이란
뜻을 지닌 그의 유고집 《팡세(Pensées)》에서 파스칼은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연약한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우주에 비하면 한 점에
불과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비참함과 우주의 광대함을 생각하고 깨닫는 능력 때문에 역설적으로
인간은 존엄하다는 의미입니다. 생각하는 갈대로서 인간을 이해한 파스칼은 1654년 자신이 겪은 강렬한 종교적 체험에서 깨달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철학자와 학자들의 하느님이 아닌”이란 문구를 죽을 때까지 옷 속에
꿰매어 간직할 정도로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이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하느님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란 구체적 인물의 삶에 개입하시고 그들과 관계 맺으신
점을 깨달으면서, 하느님은 당시 이성에 의해 추론되거나 우주의 원리로 존재하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신이라기
보다는,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만나는 하느님으로 경험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책상에서 논증하는 대상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영혼에 확신과,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실재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파스칼은 추상적인 이념으로서의 신을 넘어서 뜨거운 심정(心情)으로 만나는 살아있는 인격적인 하느님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지난 주일 복음과는 다른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그는 엘리야 예언자와 같은 외모와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는 해방된 조상을 연상하는 생활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곧 올 하늘나라를 맞이하기 위하여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도층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할 정도로 꼿꼿한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갈대처럼 흔들리던 사람들은 흔들림 없는 그의 태도를 통해 임박한 하늘나라에 큰 기대를 걸고 너도나도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선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마태 11:3)라고 묻습니다. 그는 확신에 찬 하느님의 사자(使者)에서 갈대와 같이 흔들리고 망설이는 구도자(求道者)로 변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흔들리게 했을까요? 여기서 잠시 세례자 요한의 삶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사제 아버지 즈가리야와 모세의 형 아론 집안의 후손인 어머니 엘리사벳의 아들입니다. 그것도
늙도록 아이를 얻지 못하던 노년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기적적으로 얻은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마도 부모는
이 아이를 유대교 전통에 따라 하느님께 특별히 성별 된 사람이라는 ‘나지르인’(민수 6장 참조)으로
봉헌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세상과 구별되어 성스러운 삶을 살며 하느님께 헌신된 삶을 산
세례자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망과 믿음이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례운동을
통하여 종말론적 구원을 준비하는 사명으로써 자신의 전 삶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위정자들의
미움을 사서 수감되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 나라 준비를 위한 세례운동이 끊길 위기에 직면하자, 그는 깊은 내적 고뇌에 휩싸였습니다. 그때 그는 제자들로부터 예수님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태오 복음저자는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듣고”(마태 11:2). 그런데 이
대목에서 눈길을 끄는 단어가 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자 요한은 일반 사람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알고 있던 것과 달리, 그 일을 하시는 분은 필경 기름 부은 받은 자, 즉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일 것이고, 이 분이야말로 오랫동안 기다려
온 ‘오실 분’으로 희망을 걸고 싶은 속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이 희망과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어쩌면 믿음과 회의,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며 그 확실한 답을 듣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마태 11:4-6)라고 대답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오실 분이 어떤 분이고, 하느님나라가 어떤 건지하는 그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시대에 있을 구체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그 일들을 듣고 세례자 요한이 판단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세례자 요한이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의 생애가 송두리째 흔들렸을 영적 어두움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을 보고 다시한번 믿음의 끈을 붙잡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전통적으로 교회는 대림3주일과 사순4주일을 ‘장미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분홍색 영대와 제의를 착용합니다. 보통
대림절과 사순절에 보라색 영대와 제의를 입음으로써 속죄와 회개의 시간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지만, 오늘처럼
대림과 사순 중간에 분홍색 제의를 입음으로써 기쁨의 시간이 곧 도래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해에 맞이하는 장미주일은 그저 설레고 기쁘기만 한 분위기는 아닙니다. 거기에는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 다가올 희망 간의 긴장이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역만리 유배
갔던 백성들이 고국으로 귀환한다는 기쁨이 있지만, 동시에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어떻게 재건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현실 가운데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마라.”(이사 35:4)라고 격려하면서, 시온 산으로 돌아오는 길이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궁극적 희망을 제시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당시 부유한 지주나 상인들이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품삯을 주지 않거나, 의로운 자들을 고소하고 죽이는 불의를 저지르는 상황(야고 5:1-6 참조)에서
인내심을 시험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재림하실 주님의 날을 고대하며 소출을 낼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농부처럼 고난과 불의를 견디어 내라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은 감옥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세례자 요한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면서 의심을 품지 말라고
하시며 그래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모든 역경이 깔끔히 정리된 상태에서
누리는 기쁨이라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실현될 것을 믿기에 행복하게 되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예배 중에 추구하는 기쁨은 온실 속에서 잘 가꾸어진 예쁜 꽃을 보고 행복해하는
기쁨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살면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설 때 대면하는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어서서 전진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살면서 직면하는 갖가지 부조리함과 부당함 그리고 억울함이
몰려올 때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견디고 극복해 내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나의 신앙이 흔들리고 나의
믿음이 흔들릴 때 평소에 내가 간과했던 사람들과 사건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거기서 구원과 희망을 발견할 때 느끼는 기쁨입니다. 이제 이 예배를 통해 주님께 간구합시다. 우리가 비록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연약하지만, 뽑혀지거나 꺾이지 않게 해 주시길 기도합시다. 그리고 시력을 잃은 나를 다시 보게 하시고, 청력을 잃은 나를 다시
듣게 하시며, 걷지 못하게 된 나를 다시 걷게 하시고, 병으로
약해진 나를 다시 건강케 하시길 기도합시다.
갈대와 같이 연약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연약한 아기로 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