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5 가해 사순4주일 사무상
16:1-13 / 에페 5:8-14 / 요한 9:1-41
안목(眼目)
고대 중국의 역사학자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있는 공자와 제자들 간의 이야기를 다룬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편을 보면, 공자는
훗날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고 합니다: “나는 말로 사람을 골랐다가 재여에게 실수했고, 외모로 사람을 보았다가 자우에게 실수했다(吾以言取人 失之宰予 以貌取人
失之子羽)” 이처럼 현인(賢人)이라 칭송받는 공자께서도 언변이나 외모 등 겉보기만으로 제자를 골랐다가 낭패 본 것처럼, 사람 보는 눈을 갖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안목(眼目)’이라고
부릅니다. 안목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그
좋고 나쁨, 진위, 가치 등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물의 가치를 분별하는 식견인데, 이것은 단지 물건을 보는 것을 넘어서 사람, 사건, 미래가치 등을 본질적으로 꿰뚫어 보는 능력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는 바로 이러한 안목에 대한 대표적
예라고 하겠습니다. 사울 왕의 불순종으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 예언자에게 또 다른 왕을 세워 기름 부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에게 가서 그 아들들을 하나씩 부릅니다. 그때마다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용모나 신장을 보지는 마라.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사무 상 16:7)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사무엘 예언자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다양한 사람을 접하였고, 그래서 용모나 태도를 통해 나름 사람보는 안목을 갖췄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사무엘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사실, 성서는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을 선발할 때, 사무엘이 용모를
중시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사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그만큼 잘생긴 사람이 없을 만큼 끼끗하게 잘 생긴 아들이었다. 누구든지 그의 옆에 서면
어깨 아래에 닿았다.”(사무 상 9:2) 당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나라들은 이스라엘보다 힘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강력한 힘이 필요했고, 그런 이유로
사무엘은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을 갖춘 장군이면서 동시에 훤칠한 용모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지도자 감으로 사울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공자께서 외모로 자우(子羽)를
선택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그러한 안목은 실패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무엘은 그러한 실패를 새로운 왕을 뽑을 때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사무엘 예언자의 마음에 다른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리하여 이새의 아들 중 제일 어린 막내아들 다윗을
보자, 하느님은 “바로 이 아이다. 어서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사무 상 16:12)라고 하셨고, 사무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형들이
보는 앞에서 가장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물며 사무엘과 같은
대(大)예언자도 사람을 선발할 때 이처럼 어려움을 겪었는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얼마나 더 힘들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경험과 지식이 가져오는 선입견과 편견이란 오류를 줄이면서 사물이나 사람을 제대로 보는 안목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을 통해 우리는 눈먼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안보이던 눈이 떠지고, 물리적인 외부세계를 보는 차원을 넘어, 사물의 핵심을 있는 그대로
보는 내면의 눈으로 발전하는 과정과 그리고 주변사람들은 왜 그러한 안목이 없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짜여 있습니다. 첫번째는
눈먼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눈이 떠진 치유 이야기, 두번째는 이 기적에 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논쟁, 세번째는 치유 받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적인 눈이 뜬 이야기입니다.
먼저, 첫번째 부분에 대하여 봅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거기서 구걸하는 소경을 발견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저 사람의 저런 모습은 누구 때문인지 묻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물었던 이유는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병이나 불행은 죄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같은 현상에 대하여 다른 진단을
내립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누구 탓으로 돌리려는 부정적이고 단죄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을 회복으로 전환하기 위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십니다. 예수님은 거지 소경에게 다가가서 땅에 침을 뱉아 흙을 개어 소경의 눈에 바르십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태초에 하느님이 말씀과 더불어 손수 흙을 빚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장면이 연상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창조는 말씀과 행동이 결합된 것이고, 구원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 후 거지 소경은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사람들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습니다. 그는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그러나
그가 눈떴을 때 예수께서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치유하신 분이 누군지 모릅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이 첫번째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그저 ‘그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다음으로 두번째 부분에 대해 보겠습니다. 당시 사회에선
병에 걸리면 공동체와 격리되었고, 병이 나으면 공동체로 복귀하기 위해 사제나 율법학자, 바리사이 등 공동체를 이끄는 자들에게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가서 어떻게 낫게 되었는지 경위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그들은 그날이 하필 안식일에 일어났던 것을 발견하고, 그 기적을 행한 자는 필경 하느님도 모르는 자일
것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그러자 다른 일부 바리사이들은 그런 기적을 베푼 사람이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고 논박합니다. 이렇게 심판관들이 서로 옥신각신 토론하다가, 그들은 기적의 수혜자에게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요한 9:17)라고 대답합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여기서 두 장면을 대비하고 있는데, 하나는 자신들의
지식으로 기적이 맞느냐 틀리느냐 하면서 논쟁하는 지식인들의 낡은 관념과, 다른 하나는 백지처럼 아무런
선(先)이해 없이 그러한 이론적 토론을 지켜보면서 사건의
의미를 조금씩 깨우쳐 가는 소경의 새로운 지식과의 대비입니다. 그리하여 소경은 그 과정을 통해 그러한
기적을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부분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소경이었던
자가 예언자라고 고백하자, 그는 낡은 지식의 소유자들로부터 책망과 추방을 당합니다. 그는 다시 홀로 되었습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아마도 초대교회 시기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다가 유다인 회당에서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익숙했던 옛 전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야 했고, 그 결과 교회라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가 등장했습니다. 그럼
이 공동체는 어떠한 새로운 눈을 갖게 된 걸까요? 세번째 이야기에서 나오는 치유 받은 그가 예수님을
다시 만나서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라고 고백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영적 안목으로 각성한 초대교회 공동체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을 그저 ‘그 사람’으로 여겼다가, 공부를 하면서 ‘예언자’로 알았고, 마침내 깊은 인격적 만남을 통해 ‘주님’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즉, 소경이었던 자를 포함해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모신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과거의 편견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나, 사물을 선입견 없이 볼 안목이 생기게 되었고, 그 원천은 내가 주님과 연결되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많은 사건과 사람을 접하면서 그것을 판단하고, 그
속에서 가치를 찾아내고, 때론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며 삽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을 앞두고 고심이 깊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기준을 어디에 둘 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성경말씀은 그 기준을 외적인 것들에 두지 말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에 귀 기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좋은
안목을 갖추기 위해선 먼저 경청해야 합니다. 사무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경청했기에, 자신의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남들이 알려준 것들을
무비판적으로 동조해서 편견이나 선입견이라는 지식의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을
다시 뜬 소경은 순수한 마음, 명징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있는 그대로 성찰하기 시작하였기에, 기적을 단죄하지 않고 하느님의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진리의 근원과 연결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오직 하느님과 연결되어야만, 우리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고, 설령 부족하고 잘못되었더라도 얼른 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자기주장만 고집 피우다
결국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주신 오늘의 말씀으로 여기 계신 여러분의 안목이 더 성숙하고 깊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교회, 우리 교단이 그러한 영적 안목으로
주님과 더 깊게 연결되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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