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60322 하느님의 일이 인간의 영역에서 일어날 때(사순 제5주일)
작성일 : 2026-03-22       클릭 : 10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60322 사순 제5주일

에제 37:1-14 / 로마 8:6-11 / 요한 11:1-45

 

하느님의 일이 인간의 영역에서 일어날 때

 

고대서양철학자들은 보이는 세계를 깊이 있게 관찰하고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도 사색과 명상을 통해 그 의미를 추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두 개의 학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를 다루는 학문을 자연학 혹은 물리학(Physics)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루는 학문을 제1철학 혹은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차원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봤습니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존재 현실은 사실 보이지 않는 본질이 실현된 거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물리학은 보이는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작동하는지를 연구하고, 형이상학은 보이는 세계가 왜 그러한 모습을 하는지를 알기 위해 보이지 않는 근원을 사색하는 학문이 되었습니다. 그후 자연스럽게 물리학은 과학으로, 형이상학은 종교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과학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류는 점차 보이지 않는 세계를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둘 간의 관계는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하여 말하면 이 사람 엉뚱한 사람이군”, “이 사람 또 뜬구름 잡는 소리하네라고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현대인들에게 다소 엉뚱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아멘, 믿습니다!”라고 대답은 하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처럼 설마, 그런 일이 생길 수 있겠어?”라고 회의감을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이야기들 너머에 있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들은 제1독서는 그 유명한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환시를 본 시점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국가라는 정체성이 송두리째 뿌리 뽑힌 실로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 11절 말씀에서 그러한 절망감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환시를 통해 계시하십니다. 하느님은 먼저 에제키엘에게 묻습니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에제 3:3) 인간의 상식으로는 아니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예언자는 답합니다: “주 야훼여, 당신께서 아시옵니다.”(에제 3:3) 이 말은 인간의 영역 밖이고 인간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차원이기에, 오직 하느님의 영역이자 하느님의 주권에 달려있음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움직이십니다. 창조 때 피조물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신 그 숨결이 다시 등장합니다. 에제키엘은 이제 자신의 상식과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몸소 하신 하느님의 일을 전달합니다: 마른 뼈들 간에 힘줄이 이어지고, 살이 붙고, 마침내 숨결이 들어가 다시 살게 되어 큰 무리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무리들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십니다. 예언자에게 보여준 이 환시는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유다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들의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칙령을 내립니다. 이리하여 에제키엘 예언자가 받은 계시가 실현되었습니다.         

1독서가 절망에 빠진 집단을 소생케 한 이야기라면, 오늘 복음은 라자로라는 죽은 개인을 소생케 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4부분으로 짜여 있습니다. 그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라자로의 죽음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인근 베타니아에 라자로와 마르타 그리고 마리아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 자매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들리실 정도로 관계가 돈독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자로의 인생은 이름의 뜻과는 달리 병약하고 아픈 불행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오빠를 돌보기 위해 마르타와 마리아는 남성중심의 경제사회구조 속에서 참으로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남매를 측은히 여기셨고, 그래서 각별히 마음에 두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라자로가 위중하게 되어 살 가망이 없게 되자, 자매들은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오빠의 상태를 전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예수께서 소식을 듣고서도 이틀이 지나서야 베타니아로 가셨습니다. 주변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쪽으로 가시는 것이 어쩌면 로마를 비롯한 기존 기득권세력과 싸워 다윗의 영광을 되찾을 걸로 오해하였고, 그래서 전의(戰意)를 불태웁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과 마르타 간에 대화입니다. 예수 일행이 베타니아에 도착해 보니, 라자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생명이 시체에 머무를 수 있는 최대기간은 3일이고, 4일이 되면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시신을 무덤에 묻는 장례절차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외향적인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에 집 밖으로 나가 맞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일찍 오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죽은 사람은 언젠가 살아날 것이라는 위로로 이해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요,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시자, 그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동의는 미래에 일어날 가능성의 영역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어서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언니 마르타가 집 안에 있는 동생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오셨다고 전하자, 동생은 나가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슬픔에 북받쳐 웁니다. 마리아의 울음에 따라 나왔던 사람들도 웁니다. 이 광경을 보시고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저자는 마리아와 사람들이 우는 것과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을 각각 다른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주로 장례식 때 하는 곡소리를 가리키는 울음이라면, 후자는 슬픔의 눈물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것을 왜 이렇게 다른 단어로 구분했을까요? 성서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의 슬픔은 죽음 앞에 절망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근원적인 고통과 좌절에 대한 깊은 연민이라고 하겠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이 태초에 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고 생명을 주시면서 기뻐하셨는데, 그 숨결이 빠져나가는 죽음이라는 단절과 끊김, 그리고 그로 인해 하느님과 떨어져 고아가 된 존재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에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고 명하십니다. 그러자 모두들 놀라서 말립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아픔에 공감(共感)한 것에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의 돌을 치우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역, 물리적인 자연법칙의 영역이 끝나는 지점에서 그것을 넘어서 형이상학의 영역이 자연영역 안으로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은 무모한 짓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초월자와 소통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통과 성부 하느님과의 신뢰를 갖고서 죽음의 어두운 동굴을 향해 라자로야, 나오너라”(요한 11:43)라고 외치십니다. 그러자 수건과 베옷으로 감겨 있는 라자로가 어두운 동굴에서 나왔습니다. 예수께서는 묶인 것을 풀어주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일깨워 줍니다.

첫째는 우리가 겪고 있는 비극적 현실에 대한 자각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된 것을 원하지만, 삶은 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움보다 추함이, 선함보다 악함이, 진실보다 거짓이 더 판 치는 것이 맞다고 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점차 생기를 잃어가고, 마침내 마른 뼈처럼 영혼이 탈탈 털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은 죽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일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태초에 우리가 이렇게 되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에 깊이 아파하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리고 생기 없는 우리에게 다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려고 합니다. 이리하여 물리세계 너머 형이상학의 세계에 계신 그분이 당신의 능력을 갖고서 이 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셋째는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교회는 성탄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를 직접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몸소 보여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저 세상에 계신 하느님과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다시 연결되기에 절망과 죽음을 넘어서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유한한 우리에게 주신 기쁜 소식입니다.

부활절을 기다리며 그 마지막 관문인 예수님의 고난주일을 앞두고 이 약속이 우리를 다시 살리는 힘이 되길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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