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인생을 살며 수많은 형태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해도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고난을 겪어내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부인하는 고통으로 끝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통을 이겨 부활의 기쁨을 경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사는 인생이 하느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이겨내는 믿음의 사람은 하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철저히 하느님의 뜻으로 점철된 삶이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고난과 죽음마저도 하느님의 뜻대로 겪어내시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고통을 모르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 거두어 주소서.(마26:39)”하며 죽음을 거둘 수만 있으면,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이어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시며 자신의 죽음과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죽음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겪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고난과 죽음도 하느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환난과 고난 중에 하느님을 바라보지는 않고, 고난 속에 매몰되어 있는 이들에게는 그 과정이 불행과 비극으로만 보입니다. 마치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 군중들이나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이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했던 비아냥과 비난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고난당하고 죽어야 만이 하느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십시오(요17: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때가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때가 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결국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7장 10절에서 사도 바우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는 상심은 회개할 마음을 일으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인 상심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라 겪는 상심과 고난이 종국에는 구원을 가져옴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겪을 때, 하느님의 영광과 구원 그리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을 따라 겪는 고난과 고통, 죽음의 과정은 부활로 가는 관문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의 뜻을 따라 겪는 고난과 고통은 축복의 통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난주간 참으로 주님의 고난과 고통에 참여하며, 고난 속에 감추어진 부활의 기쁨을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