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신앙 나눔  
 

감싸 주시는 하느님
작성일 : 2015-08-14       클릭 : 1470     추천 : 0

작성자 라자로  

감싸 주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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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나온다. 예를 들어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4)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마태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덧붙인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마태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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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여러 가지 상황을 자연 법칙에 따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말한다. 듣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리라. 아니면 듣는 이의 자세에 따라 달리 해석할 가능성을 두어 참된 의미를 받아들일 자세가 된 이들만 듣게 하는, 고도로 계산된 가르침의 방법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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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여러 가지 법칙이 자연 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즈음은 학문이 발달되어 사회 과학이라고 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인 현상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일반화되어 있다. 인간이 먹고 살아가는 경제에 대한 것도 갖가지 경제적 현상을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하고 예측하기도 하고 그에 따른 대안을 마련하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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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보면,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사물의 현상이나 법칙이 눈에 안보이는 인간 삶의 현상이나 법칙을 정확히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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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복잡스런 인간의 삶이 자연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속담에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한 일을 눈에 확연히 보이는 자연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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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하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한 것을 따져보자. 겨자씨 비유의 말씀은 겨자씨가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의미이다. 하늘 나라가 겨자씨가 자라듯 자란다는 의미인데, 정말 하늘 나라는 시간만 지나면 자라서 점점 켜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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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법칙은 눈에 보이는 것이어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예측하고 미리 조절이 가능하다. 반복해서 실험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이제 자연의 법칙을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데 도움이 되도록 예측하고 적절히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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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삶도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듯 파악해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예측하고 미리 조절할 수 있다면 정말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지혜로운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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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불교의 많은 가르침은 이런 부류의 가르침과 비슷하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하나 풀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원인과 결과를 깨닫게 되면 그런 삶의 법칙을 미리 조절해서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사는 데 유용하게 활용하게 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사는, 그런 삶이 아닐까. 깨달음을 이룬 사람은 삶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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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스님들이나 정신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보통 그런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면 마치 자연의 법칙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바람직하듯이, 인간의 삶에 대한 가르침을 많이 아는 것이 관건이 된다. 그래서 불교는 무지도 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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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느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내 주장이다. 물론 예수님도 불교의 가르침처럼 비유로 삶을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하느님은 살아 계시고 인간과 인격적 만남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한다. 모든 피조물에 생명을 불어넣으신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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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지만 하늘 나라는 생명이 있는 하늘 나라이기에 무조건 겨자씨가 자라듯 자라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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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모든 피조물에 생명을 부여하듯이 인간은 모든 사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생명이 부여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모든 사물에 나누어준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사물에 사랑을 나누어준다.
여기서 시 하나를 읽는다. 문정희 시인의 <머풀러>라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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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길에 나서면
사람들은 멋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녀의 상처를 덮는 날개입니다.
쓰라린 불구를 가리는 붕대입니다.
물푸레나무처럼 늘 당당한 그녀에게도
간혹 아랍 여자의 차도르 같은
보호벽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처음엔 보호이지만
결국엔 감옥
어쩌면 어서 벗어던져도 좋을
허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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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바람 부는 날이 아니라도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길에 나서면
사람들은 멋있다고 말하지만
미친 황소 앞에 펄럭이는
투우사의 망토처럼
나는 세상을 행해 싸움을 거는
그녀의 깃발입니다.
기억처럼 내려앉은 따스한 노을
잊지못할 어떤 체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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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머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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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멋쟁이 여성들이 목에 머플러를 두른다. 멋을 내는 데 사용하는 천 조각이다. 하지만 바람부는 추운 날, 목을 따듯하게 감싸주는 옷감이 된다. 흙먼지 부는 날에는 머풀러로 얼굴을 가려 마스크처럼 얼굴 보호대로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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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머플러를 이런 기능으로만 본다면 위에 나오는 시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은 이런 기능의 머풀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머플러가 ‘상처를 덮는 날개’가 된다. 그리고 ‘쓰라린 불구를 가리는 붕대’가 된다. 눈에 보이는 단순한 머풀러가 새로운 의미를 지닌 새로운 창조물이 된다. 마침내 ‘세상을 행해 싸움을 거는 깃발’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따스한 노을, 잊지 못할 체온’을 우리에게 선물하는 창조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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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렇게 생명을 지닌 하느님의 사랑받는 인격체이다. 우리는 우리와 관계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이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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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나도 불교의 깨달음은 얻은 스님들처럼 인간의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어느날 문득 그것은 수많은 율법을 배우는 것과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라가는 생활은 그것과는 다른 방식 같았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창조하며 행복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삶이 생명의 삶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께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늘 살아계신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끼며 그분께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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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의 모든 현실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일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하늘 나라의 의미를 부여하고 농부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한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볍씨 하나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나는 볍씨를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부여한다. 볍씨가 자라나서 쌀이 되어 누군가 먹게 될 텐데, 나는 그가 하느님의 나라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깨달음이 큰 스님들이 누구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는 이유를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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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사람들은 머플러 가지고 어깨를 감싸며 멋을 부린다. 바람 부는 날 얼굴을 가리기도 할 것이다. 그저 단순한 헝겊 조각이 아니다. 이제 나에게 머풀러는 새로운 의미를 지닌 하느님의 피조물이 된다. 그래서 나는 늘 하느님께 기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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