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한3서 18-19]
지하철에서 성경을 읽고 다니는데, 어제 읽은 말씀입니다. 신약성서를 읽다보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입니다.
4복음서의 사건을 통해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인간과의 드라마틱한 사랑을 보다가 바울 서신에 이르러 다시 왠지 모를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베드로, 요한서신에서 사랑을 읽게되고 계시록에서 다시 심판의 문제로 가슴이 오그라들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한1서를 가장 좋아합니다. 아마도 바울서신에서 말한 믿음과 구원 불같은 성령세례, 전도의 부담이 사랑으로 변하는 장이기 때문일것 같습니다. 바울서신의 기준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솔직히 저는 자신없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신앙의 본질이 그것은 아닐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죄와 심판의 두려움에서 시작된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닐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고민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려 찾은 결론이 요한1서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4장이 아닐까 합니다. 요한서신을 읽다보면 무섭기만 하던 근엄한 아버지 하느님이 어머니 하느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수없이 말해도 크게 와닿지 않는데 참 신기한 일입니다.
신앙의 본질, 사람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자꾸 죄와 심판으로 돌아가곤 하는 걸까요... 개신교에서 너무 오래 예수천국불신지옥을 배웠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 자신의 삶이 사랑과 너무 동떨어져 몸자체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오랬동안 찌들었던 몸이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겠죠.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가 봅니다. 몸을 닦지 않으면 더러워지듯이 마음도 계속 닦지 않으면 더러워지겠죠.
어제 읽고 또읽은 요한서신의 내용에 잡담 조금 섞어 적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삶, 손해보는 삶, 그래서 결국은 정말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삶을 한번 살아보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