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는 영국국교회에서 출발하여, 영국의 식민지를 중심으로 영국시민들을 위해 식민지에 교회가 세워지면서 세계로 전파되었다. 조선에 성공회가 세워진 것도 영국의 식민지 욕심과 전혀 무관하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영일동맹 등을 통해서 보여지는 영국의 행태는 미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영국선교사들은 선교의 기회로 여겼으며, 전혀 반성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흑역사이다.
하지만 성공회는 구교와 신교 사이의 중도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 교회법이나 신앙고백과 같은 단일한 관점이 아닌 예배를 통해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점, 교회일치를 위해 노력했던 점,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했던 점, 에큐메니컬 신학(정의/평화/생명, 하느님의 선교)에 기여했던 점, 스스로를 완변한교회라 하지 않고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교회로 가는 여정에 있는 교회로 규정한 점 등은 독특하고도 훌륭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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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의 잦은 이혼을 두고 호색가의 여성 편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는 천생 국왕, 그러니까 정치가였다.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한 것은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위를 계승할 혈통이라고는 메리 공주뿐이었는데, 헨리 8세는 공주가 왕위를 이을 경우 발생할 정치적 혼란을 깊이 염려했다. 예컨대 부왕 헨리 7세만 해도 모계를 통해 랭커스터 왕가의 가장으로 인정받은 탓에 많은 반발과 반란을 겪어야 했다. 더구나 병약하여 늘 몸져누운 아라곤의 캐서린에 대한 애정도 식은 지 오래였다.
캐서린과의 이혼은 성공회(聖公會, The Anglican Domain)라 일컬어지는 영국국교회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혼을 금하는 가톨릭교회의 원칙에 따라 헨리 8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아라곤의 캐서린은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이모였으니,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 이혼 불허. 이에 대해 헨리 8세는 1533년 1월 25일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과 비밀 결혼을 하고 1534년에는 수장령으로 맞섰다. 수장령이란 국왕을 영국 교회 유일의 최고 수장(首長)으로 규정한 법령이다. 수장령으로 영국 교회는 로마 교회에서 분리됐다.
네이버 케스트 "헨리8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16
헨리8세가 영국국교를 처음 지정한 것은 맞지만, 성공회의 정체성은 그 후 에드워드-메리(천주교로 다시 바꿈)-엘리자베스1세(성공회로 다시 바꿈)로 이어지는 정치상황 속에서 다듬어지고 확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상황을 이용하여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신학자들에 의해 정체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떻든 이 역사는 '성공회' 기원의 한 부분, 특히 영국성공회의 한 부분은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한국성공회'가 이 부분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싶다. 첫 문단에서 말했듯 한국성공회는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되었지만, 그들의 부정적인 부분까지 수용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즉, 한국성공회는 한국의 성공회이지 헨리8세의 성공회는 아니다. 세계 성공회 어느 관구도 자신을 헨리8세 때의 성공회로 규정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영국성공회조차 말이다.
헨리8세의 이혼과 염문으로 만들어진 교단이 성공회라니...라며 당황해하는 성공회 신자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당신을 규정하는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성공회는 길 위의 교회로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데 왜 아주 오래전 이야기에 압도되어, 그 후의 걸음과 현재 서 있는 곳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헨리8세의 이혼과 염문으로 만들어진 교단이 바로 성공회라고 말하는 성공회 밖의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헨리8세는 영국이란 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고,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던 '정치인'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