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르네상스 이경래 신부(성공회대학교 / 서울정동협의체) 1. 역사학과 도시사회학에서 본 ‘재생’ 얼마 전부터 우리주변에선 ‘재생’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 있다. 그전에는 ‘개발’ 혹은 ‘재개발’이라는 단어가 더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주로 사용되는 말의 변화는 그것이 디디고 있는 삶의 자리가 어떻게 변하는가에 기인한다. 19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서울의 변화는 그런 도시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 사대문 안에 불과했던 서울은 1970년대 강남개발과 1980년대 올림픽 유치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팽창했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해 서울은 새로운 지역을 ‘개발(development)'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 지역을 ’재개발(redevelopment)'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랫동안 삶의 터전을 바탕으로 피어난 지역의 문화 및 역사를 단절시키는 비인간적이고 몰역사적인 방식이었다. ‘재생(regeneration)'이란 개념은 그러한 개발방식에 대한 성찰과 ‘급격한 경제개발시대 이후’의 부작용에 대한 반성에서 생겨났다. 1970년대 서구 도시사회학과 도시정책에서부터 사용한 ‘재생’개념은 2007년부터 한국 도시사회학 학계와 정부연구원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이 말은 도시사회학이나 도시재생정책에서 사용되기 이전부터 존재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4세기부터 16세기 유럽 그중에서도 알프스 산맥 이남에서 부흥했던 ‘르네상스(Renaissance)'이다. 흔히 ‘문예부흥’이라고 번역하는 르네상스는 서구정신의 양대 근원 중 하나인 그리스·로마문화의 재발견과 이를 통해 유럽문화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하는 ‘문화혁신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천 년간 유럽의 정신을 지배해 온 기독교의 지나친 ‘신본주의’에 갇혀있던 사람들에게 그리스와 로마문화에 내재된 ‘인본주의’를 재생시킴으로써 억압된 인간성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정신운동이었으며, 이 운동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독일, 스위스, 영국으로 가면서 마침내 신의 권위를 독점하고 있는 교회의 전횡에 대한 저항과 신과 인간 사이에 직접 소통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동력으로 전화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는 비인간적이고 몰역사적인 교회의 독단주의(dogmatism)에 갇힌 인간본연의 정신을 회복하는 ‘재생’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2. 정동: 역사학의 재생과 도시사회학의 재생이 만나는 지점 공간적 측면에서 볼 때, 정동은 서울 한복판에 있다. 정동 외곽에는 광화문과 서울시청, 숭례문, 경희궁이 자리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서울을 대표하고 상징해 온 궁궐과 관청, 건축물들이 정동을 에워싼 모양새다.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신문로, 태평로, 서소문에 인접한 지역이다. 말 그대로 서울의 ‘속살’이자 ‘고갱이’와도 같은 곳이 정동이다. 또한 시간적 측면에서 볼 때, 정동은 우리역사, 특별히 근·현대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인간문명의 기록이자 삶의 창고를 발견할 수 있다. 역사를 영어로 '히스토리(history)',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듯이,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정동을 말할 때 장소를 이야기하고 시대를 이야기하고 나아가 사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동의 사람들은 조선시대에는 왕의 신민들이었고, 대한제국시대에는 황제의 백성들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사람들이었고, 해방 후에는 산업화와 민주주의의 토대를 가진 시민들이었다. 이처럼 정동은 해마다 늙어가고, 해마다 젊어진다. 2016년 6월 16일, 우리 교회를 포함하여 정동 지역 내 기관 및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정동역사재생협의체’ 발대식을 하고 정동지역 도시재생활성화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첫 결실로 2018년 4월 6일 협의체를 공식출범하고 서울시와 함께 우리 근현대사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동 일대 역사와 문화가치를 재생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서울시에서 실행하는 다른 지역의 도시재생과 달리 주거와 상업 환경을 개선하기 보다는 “정동대한(大韓),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우리 근현대사를 재조명함으로써 묻힌 역사와 문화를 재생하고 지역을 활성화해 미래로 나아가려는 비전을 품고 있다. 3. 한국 기독교의 요람인 정동 정동은 한국 근·현대 정치와 외교, 교육과 종교, 언론과 예술, 정치와 법률이 싹튼 거리이다. 그 중에서도 정동은 우리 성공회를 비롯해 구세군, 감리교, 장로교, 천주교, 심지어 정교회까지 한국교회 주요교단의 요람이자 정신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곳에는 벧엘예배당(현 정동제일교회), 구세군사관학교(현 정동1928아트센터), 배재학당(현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이화여고(현 이화박물관), 성공회주교좌성당이 있어 우리는 이곳을 통해 초창기 서양 선교사들과 신앙의 선조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기억한다. 해방 이후, 정동에는 한국의 고난과 함께 해 온 기독교의 증언이 있다. 한국전쟁 때 구세실(Alfred Cecil Cooper)주교를 비롯해 마리아 클라라(Mary Clare)수녀, 감리교 젠슨(Andersen Kristian Jensen)목사, 천주교 교황청 대사 번(Patrick James Byrne)주교, 구세군 허버트 로드(Herbert Arthur Lord)사령관 등 수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인민군에 끌려 중강진까지 ‘죽음의 행진(Death March)'을 하였고, 한국인 성직자와 평신도 지도자들도 희생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정동은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의 열망으로 가득 찼던 곳이기도 하였다. 1987년 6월 항쟁은 우리성당에서 울린 42번의 종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이것은 해방 이후 42년이 되는 해에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는 뜻을 담아 100만 시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그리고 오늘날 매주 감리교정동제일교회의 월요정오음악회, 성공회주교좌성당의 수요정오음악회를 통하여 정동의 교회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직장인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선사하고 있다. 또한 정동에는 한국인 교회뿐만 아니라 화교교회도 있다. ‘여한중화기독교한성교회(旅韓中華基督敎漢城敎會)’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화교들은 스스로를 나그네로 생각한다. 언젠가 고향 중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망을 하면서 신앙을 통해 마침내 기독교인의 고향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며 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정동의 기독교는 우리사회에 복음전파에 국한하지 않고 교육과 의료, 언론 등 근대문화를 잉태한 곳이자 우리 근현대사의 변곡점마다 시대의 고난을 함께 겪고 예언자의 목소리를 낸 곳이며, 사람들의 감성을 위로하는 문화의 장이자, 민족을 넘어 세상 만민을 품어야 하는 기독교의 보편성이 구현되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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