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7 연중 30주일 설교문
말씀과 친교와 봉사의 삶을 살면서 믿음의 어른이 되자!
김은경 드보라 사제
1. 이제 완연한 가을입니다. 일산은 사계절이 다 아름답지만 가을이 특히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단풍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가고 이제는 낙엽도 제법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낙엽은 한 생명이 태어나서 자라고 또다시 새 생명을 움터서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 것처럼 이 가을날에 우리 자신의 자기중심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느님을 우리 자신의 존재와 삶의 중심에 모신 사람으로 거듭 새롭게 태어나는 경험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복음서에서 루가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자기네만 옳다고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두 명의 대조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하느님께 자기 의를 자랑하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며 하느님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느님께 죄 많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사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였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3. 바리사이파는 사회 지도층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는 사회지도층에게 품위있고 따뜻하게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본을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비유이야기에 나오는 바리사이인은 세리를 비난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한 것같이 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한을 누릴 줄만 알았지 의무를 다하지 못했던 겁니다.
바리사이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혹시 우리가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나으면 낫지 모자라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서 멈추어 있다면, 우리도 바리사이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걸 개선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할 역할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찮가지입니다. 그 상태에만 머문다면 우리도 바리사이인과 같이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할 겁니다.
4. 하느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이루어서 예수님처럼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친교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치고 선포하며, 서로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말씀과 친교와 봉사의 삶에 참여하고 헌신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루며 살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과 친교와 봉사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데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식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셨던 방식입니다. 말씀과 친교와 봉사의 삶에 대한 소명을 망각할 때 우리도 바리사이인처럼 세리를 자신의 지체가 아닌 자신과는 상관없는 대상으로 전락시킵니다.
비유이야기에 나오는 바리사이인은 바로 이 말씀과 친교와 봉사의 삶을 살아가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마저 자신을 자랑하느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나 하느님과 더불어 친교를 나누거나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봉사할 수 있을지 묻지 않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마저 그러하다보니 세리에 대해서도 자신이 돌보고 말씀과 친교를 나누며 봉사해야할 이웃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바리사이인과는 달리 끊어졌던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리는 율법적으로보면 바리사이인에 비해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기 존재와 삶에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개입될 수 있도록 하느님에게 솔직히 자신을 열어 보였습니다. 이제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치고 선포하며, 하느님과 친교하며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삶을 위한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우리도 세리처럼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귀를 열어서 우리 자신의 가슴을 치며 "주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요"라고 고백하며 말씀과 친교와 봉사의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삶에 참여할 수 있기 바랍니다.
5. 요즘 제가 기도할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어른이 되라. 그래서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성직자로서 교회를 섬기고, 신자들을 돌보라"는 소리가 자주 올라오는 걸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직자가 되기 전에 심층심리검사를 합니다. 저는 초자아가 강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기준이 높고 현실적이기보더는 이상적인 면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간극때문에 자기비난이 많은 사람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자기비난이 타인을 향해서도 발휘되기 쉽고 습관적으로 그러고 있다는 걸 최근 몇년전에야 알았습니다.
어떤 가치나 이상에 맞지 않으면 타인이나 저 자신을 막론하고 비난하면서 마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것처럼 안주하고 있는 오래된 습성을 마주하면서 주님께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성장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와 이웃을 따뜻하게 봐주고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는 어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 자신을 직면할 때마다 하느님은 그동안 만나게 해주셨던 좋은 어른들, 곧 믿음의 선배들이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6. 어린 시절에 저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던 권사님들과 장로님들 그리고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중에 요즘에 특별히 생각나는 분은 지씨 성을 가진 권사님입니다. '지권사님'과 알게 된 건 저희 집 막내 동생이 갓난아기였을 때 크게 아파서 생사기로에 있었을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당시가 1980년대 초반이었고 의학도 요즘과 같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고 원인조차 알 수 없이 병원에 입원시킨 남동생이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회되었고 결국에는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매달려야겠다고 결심하시고, 의사에게 집안 어른들과 상의하고 돌아오겠다며, 막내동생을 퇴원시켜달라고 하셨답니다. 그길로 구역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구역장님이 저희 집에 '지권사님'이라는 분을 모시고 오셨다고 합니다.
'지권사님'은 남동생 상태를 보시고는 어머니에게 삼일동안 이 가정에서 제단을 쌓겠느냐고 물으셨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답니다.
그날을 넘기기 어렵다던 의사의 말과는 달리 남동생은 첫날 예배를 드리고나서 그날 밤을 무사히 넘겼습니다. 약속한 삼일간 예배를 드리고 나니 막내 동생이 완전히 낫는 신비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 일이 인연이 돼서 십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권사님'이 간경화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지권사님'은 매주 목요일마다 저희 집에 오셔서 기도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저희집이 초등학교 때 산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경사가 매우 가파른 곳에 있었습니다. 처음 이사 갔을 때, 동생들이 어머니 옷자락을 붙들고, 떨어질 것 같다며 무서워했을만큼 가파른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높은 지대로 이사왔던 저희 집에 이제는 일흔 살이 넘으신 '지권사님’은 그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목요일에 가정예배를 드리러 와주셨습니다.
이사온 후 처음 방문하시고 나서 권사님은 마음 속으로 경사가 너무 높아서 한번만 오고 다음에는 못 올 거 같다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희 집에 다녀가신 날 꿈을 꾸셨는데, 하느님이 ‘지권사님’을 번쩍 들어서 어떤 집에 들여보내시는데 가만 보니 그게 저희 집이었다고 합니다. 그 꿈을 꾸고 난 후에 지권사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목요일 오셔서 저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제 눈에 ‘지권사님’은 하느님이 저희 가정에 보내주신 천사 같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돌보고 계시다는 걸 알게 해주신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권사님의 기도는 소박했습니다. 당신이 방문하신 가정을 하느님이 눈동자와같이 지켜주시고,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가며 주님의 자녀답게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붙들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요즘 ‘지권사님’이 자주 생각나면서 참 고마운 분이었다는 생각이 올라오고는 합니다.
7. 제가 성공회에 와서 주교님과 교회로부터 사제서품까지 받았는데, 신자분들에게 하느님이 신자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마음을 잘 전달해 드리고 있는지, 하느님의 돌보심을 잘 전달하고 있는지, 예수님을 의지하시도록 예수님께로 잘 인도하고 있는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계시는 주님의 자녀들을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닮고 싶도록 소망을 불어넣고 있는지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고 헌신할 수 있도록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하고 있는지 자문해보고는 합니다.
아니면 예수님께 가고 싶은 마음을 가로막는 삯군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묻고는 합니다. 부디 제가 주님을 가리고 있었다면 용서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붙들리시고 부활에 대한 소망 안에 머무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확신 안에 머무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저를 비롯한 성공회 성직자들이 신자 분들을 하느님께 가까이 가시도록, 예수님께로 잘 안내하는 좋은 목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의 직무 사제인 사제들뿐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사제인 여러분도 고통 속에서 울고 있는 외로운 이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시고, 고통받는 이들 외로운 이들을 돌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8. 구체적으로 우리 교회 평신도 지도자분들이 계십니다. 교회위원분들과 구역장님들, 활동단체 회장님들 이외에도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봉사하고 계시는 귀한 지체들 모두가 서로를 신앙의 어른으로서 돌보시기를 권면드립니다.
이 일은 우리 주 예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통해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일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서 구역장님들은 구역식구들의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셔서 그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필요하시면 성직자들을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구역 모임 등 신앙의 모임은 음식을 나누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기도 제목을 나누고 그 가정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말씀과 친교와 봉사의 삶이 우리의 존재와 삶에 스며 들어서 실제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말씀과 친교와 봉사라는 리듬을 가지면 우리 일산교회 안에 또 다른 가정교회들이 세워져서 잃어버린 주님의 양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잃어버린 주님의 양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로 데려가는 겁니다. 현재 교회학교는 10월부터 교사들과 어린이들이 합심해서 성탄절날이 되기까지 '잃어버린 양을 찾습니다. '라는 전도축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선생님들이 회의를 하여 지혜를 모으고 기도카드를 만들어서 합심해서 어린이 감사성찬례 시간에 함께 기도드리고 어린이들이 자기 주변에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잃어버린 하느님의 양을 떠올리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 일을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시작했지만, 일산교회 어른들도 함께 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9. 사도 바울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테후서 4장에서 자신이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다고 하며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자신은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으며 이제 정의의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의 고백을 들려주었습니다.
처음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하여 사도가 된 것과 같이 우리 세상에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디모테 후서 4장 16절부터 18절까지 이어서 말하지만, 그는 고발당해서 재판정에 불려갔을 때 한 사람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고 모두가 버리고 가버렸을 때에도, 그들이 벌을 받지 않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그는 모두가 그를 버렸을 때, 예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힘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힘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완전히 선포하고 그 말씀이 모든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그는 사자 밥이 될 뻔한 일도 주님께서 벗어나게 해주셨다고 고백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모든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내어 구원하셔서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말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하며 디모테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사도 바울로가 참으로 고마운 믿음의 사람 곧 곧 믿음의 어른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삶으로 살아낸 믿음의 삶에 따라 나서라고 확신을 가지고 그의 제자 디모테오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는 삶, 하느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몸소 살았던 바울로의 권면은 목숨을 건 진짜 힘있는 권면입니다.
우리는 삶으로 신념을 보여준 사람 그래서 믿음으로 현실을 변화시켜 나간 사람이 진짜라는 걸 잘 압니다. 우직하게 하느님께 물으며 겸손하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지혜를 얻고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까지 성장한다는 걸 사도 바울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삶으로 예수님을 닮는 길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테오에게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디모테오를 이끌었던 믿음의 길, 그리고 여러분 각자가 알고 계신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복음을 위한 선한 싸움을 싸우는 믿음의 삶을 우리가 서로 격려하고 돌보며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로가 참으로 어른이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 디모테후서 4장 17절 말씀에 나옵니다. 그는 죽게 된 그를 버리고 간 모든 사람들이 벌을 받지 않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자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저들이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하는 것이니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배신하여 떠나간 사람들을 용서하는 게 쉽지 않다는 데 동의하실 겁니다. 우리는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동네 사람들 위에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리게 해달라고 했던 요한과 야고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로처럼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핍박하던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 곧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여서 우리들의 한계가 만들어낸 죄악과 허물까지도 다 품어내서 생명을 살리는 삶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 좋은 믿음의 사람 곧 어른이 되어서, 아파하는 이 사회와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하느님의 마음을 전해주며 돌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친교와 봉사의 삶을 살면서 믿음의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셔서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