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에는 첫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 안의 모임처소인 한 다락방에서 성모 마리아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지내다가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습니다.(신약성서 사도행전 참조) 이후에 예수의 제자들은 가르치는 사도(apostles)가 되어 로마제국 전역에서 복음을 전했고 특히 유대교인으로 기독교의 극렬한 박해자였던 청년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나 극적인 회심을 하여 사도가 되었고 그는 자신이 배운 헬라세계의 세계관에 기독교를 접목시켜 기독교가 그리스와 로마세계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 기독교회는 상당한 기간 동안 특별한 건물이 없이 가정에서 모였으며 대표적 장소들은 신약성서의 서신서들의 수신지로 되어 있는 코린트, 필립보, 로마, 에페소, 라오디게아, 골로사이 등입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이 안식일로 지키는 토요일을 피해서 부활의 날인 일요일에 모임을 가졌으며 순교성인 유스틴(St. Justin)의 기록에 의하면 예배 양식은 성서낭독, 설교, 기도, 봉헌, 감사기도, 성찬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 등의 순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비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자발적으로 행했던 고아와 가난한 이들과 과부에 대한 광범위한 구제 사업에 놀랐으며 이들이 실천한 사랑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서로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라!’고 경탄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행해야 할 신격황제숭배를 기독교인들이 곳곳에서 거부하면서 기독교는 박해의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오히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증언할 정도로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점점 순교를 각오하고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잘 알려진 대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는 박해받지 않는 로마제국의 한 종교로서 공인되었고 서기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인 국교로서 선포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이랄 수 있는 성서는 구약성서가 이미 B.C.2-3세기경 히브리어에서 당시 지중해 세계의 국제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어(70인역, Septuagint)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한 몇 개의 복음서들과 사도들이 저술한 서신서들이 읽혀지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공인된 27개의 신약성서 목록이 구약성서와 외경을 포함한 목록과 함께 서기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경(正經, canon)'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성서가 바로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성공회 등 공교회가 사용하는 성서입니다.
박해가 끝나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국교가 되자 그동안 눌려있었던 신학적 의문들과 다양한 견해들이 폭발적으로 분출되었으며 여기에 단지 출세를 위해 기독교 성직자가 되는 이들이 뒤섞이면서 교회는 열정적 토론의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의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개념의 문제를 가지고 초대교회는 격렬한 토론 끝에 여러 번의 공의회를 통해 사도들의 신조(사도신경) 이외에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선언하여 이 문제들을 정리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교회 내의 혼란을 피해 순전한 영성생활을 함으로서 함께 진리를 연구하는 이들이 모여 수도원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과 성찬의 예배와 성서와 신경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활발한 구제활동과 순교, 수도원활동 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4~5세기를 통해 드러난 초대교회의 모습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는 영국으로부터 프랑스와 이탈리아반도, 북 아프리카와 이집트, 소아시아 등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또다시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