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끝에는 항상 송영으로 끝나는 것이 성공회의 일반적인 관습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단순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끝맺을 수 있지만 주일 성찬례에서는 주로 송영 즉 영광송으로 끝나게 된다. 2004년 기도서는 영광송이란 말 대신에 송영이란 말을 도입했는데 이는 미사 시작 시에 부르는 영광송(Gloria in Excelsis)과 구분하기 위해서 시편 끝에 부르는 소영광송(Gloria Patri)과 본기도 영광송은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송영이란 말로 다르게 바꾼 것이다.
본기도 송영은 2004년 기도서 2판 수정문을 보면 다음 세가지가 기도의 내용에 따라 선택되게 되어 있다. (1판에서는 1번과 내용이 같은 긴송영이 있었지만 내용만 길 뿐 차이점이 없어서 2판에서 수정되었다) .
1)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2) 성부 하느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와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시나이다. 아멘 3)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이중 3번의 경우는 드물기는 하지만 본기도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호칭하여 드리는 경우에 사용되는데 예를 들면 사순5주일, 부활4주일, 그리스도의 성체일, 연중11주일, 사계재일 수도자 본기도 등이다. 아래는 사순 5주일 본기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드림으로써 주님의 수난을 예비한 여인을 칭찬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모든 것을 봉헌하여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게 하소서.”
위 본기도를 보면 그 시작 호칭이 성부 하느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고 있기에 기도 끝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1번 송영이나 2번 송영은 어법상 사용할 수가 없게 된다. 물론 이런 일은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이 글의 요점은 우리가 편의 상 1번 송영만을 즐겨 사용하는데 성공회 기도서에 있는 2번 송영이 좀 더 확대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런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의 모든 기도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드리는 것]이 정식이었다. 그리고 이 구도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도식이기도 했고 유대교의 일신론이나 동양의 다신론적 공격에 대한 반박의 구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앙은 기독교 정통신앙의 표식이었고 이는 신경의 구성이나 성찬기도의 구성 속에서 극명하게 표현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소위 가파도기아 논쟁 즉 성자는 성부의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 이단 논쟁을 거치면서 교회는 성자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든 기도 속에서 우리가 많이 쓰는 1번 송영처럼 성자의 신성을 강조하는 전례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로마의 성찬신학이 단순히 그리스도론에 관련된 것으로만, 기껏해야 이위일체론(Binitarian) 적인 것으로 비판을 받은 것도 어찌보면 이러한 논쟁의 결과에 기인해서 한편으로 기울어진 결과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로마는 회칙 ‘하느님의 중재자’를 통하여 전례를 정의 하면서 그리스도를 예배의 대상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예배를 드리는 주체로도 설명을 한다. 즉 전례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자기 창설자이신 그리스도께,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성부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암브로스 베르홀의 말은 한번쯤 새겨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가 전적으로 정당하다 할찌라도 모든 지향이 궁극적으로 성부께 향하지 않는다면 일종의 피상성과 빈곤을 드러낸다.사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전례 안에서 깊은 실재이지만 최종적 실재는 아니다."
본기도 송영 2번은 이런 의미에서 거의 유일하게만 사용되는 1번 송영보다 더 자주 사용되어야 할 중요한 신학적 구도를 갖추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