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역사와 성공회의 응답
-crossing boundaries : 大同을 향한 실천적 용기-
李京來(서울교구 사제, 역사학 박사)
Ⅰ4개의 지형 – 판세읽기
1. 기억의 지형: 8월15일
해마다 8월15일이 되면 한중일은 이 날을 기념한다. 그런데 나라마다 그 기억의 모습이 다른 것 같다. 중국의 경우, ‘항일전쟁 승리의 날’로, 일본의 경우, ‘종전의 날’로, 그리고 한국은 ‘광복의 날’로 그 날을 기억한다. 이와 같이 하나의 사건에 대한 나라마다 그 기억방식이 다르다는 것은 현재를 보는 시각, 나아가 미래를 향한 방향이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중국이나 일본이나 모두 과거기억의 중심에 ‘전쟁’이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한쪽은 침략자에 대항하여 마침내 승리를 일구어냈다는 자부심이, 다른 한쪽은 종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패전이라는 충격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한 심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문제는 과거를 표현하는 현재의 태도인 것 같다. 양쪽 다 전쟁을 매개로 하는 한, 서로의 상처가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사실 고통의 정도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아마도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고통의 강도가 더 심하지 않았나 싶다. 나라가 망한 것을 물론이려니와 원치 않은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생명이 희생되었고, 심지어 독립운동 하러 중국이나 러시아 등 해외로 나갔다가 일본의 스파이로 오해받거나 자기나라군대가 아닌 중국군소속으로 이름도 없이 죽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이후 자기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에선 이들에 대한 이름은 잊혀져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식민지 지배가 갖고 온 슬픈 한국인의 운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광복’이란 기억은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아니, 벗어나야겠다는 의미가 강한 것 같다.
2. 정치의 지형: 역사적 만남과 그 이후
필자가 중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2005년 4월 26일 남경 綠口공항에 도착한 대만 국민당 주석 連戰은 다음과 같은 말로 공식적인 중국대륙 첫 소감을 피력했다: “臺北에서 거리상 그리 멀지 않은 이곳 남경까지 오는데 실로 수 십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1946년 일제가 패망한 후, 국민당의 장개석과 공산당의 모택동 간의 회담이 있은지 6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양 세력이 이제 ‘하나의 중국, 조국의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다시 악수를 하였다. 국민당 주석의 공식방문이 끝나자마자, 곧 이어 대만 친민당 주석 宋楚瑜 역시 대륙을 공식방문 하였다.
사실, 한반도의 남북문제이건 아니면 중국과 대만의 양안문제이건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문제라고 본다. 그것은 중국과 한국이 서양과 일본의 침략이 낳은 ‘식민지 후유증’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지금 분단되어 있는 이 상태를 어떻게 평화적인 방법으로 극복하느냐가 동아시아 평화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그 당시 양안 두 정상 간의 역사적 만남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2000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회상하였다. 그때 필자는 신대원생이었다. 6월의 초여름, 한창 기말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평양비행장에서 남북 간의 정상이 서로 악수하면서 만났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때 필자는 한민족으로서 동시에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기도하면서 찾았다. 그 결과 필자는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중국과 중국교회를 주목하였고, 중국에 유학 오게 되었다. 그 후,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2005년 필자는 중국에서 제3자로서 중국인들의 통일열기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시 5년이란 세월이 흐른 오늘, 필자는 다시금 냉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한반도와 이른바 ‘차이완’(China+Taiwan)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긴밀해지는 양안을 바라보고 있다.
3. 경제, 문화의 지형: 갈수록 늘어나는 한중일간 교류
개혁개방정책을 시작한지 30년, 중국은 정치, 경제를 비롯한 모든 방면에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예컨대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중일 3국간 상호의존을 볼 때, 한국은 중국의 네 번째 수출대상국이고, 중국은 한국의 첫 번째 수출대상국이며, 일본은 한국과 중국 모두 3번째 수출대상국이 되었다. 이처럼 한중일 삼국은 나날이 밀접하고 중요한 경제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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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한국무역협회 [무역통계] | |||||||||||||||||||||||||||||||||||||||||||||||||||||||||||||||||||||||||||||||
그리고 이점은 비단 경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외교에도 그 중요성이 나날이 중시되고 있다. 예컨대, 이른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이북에 대한 인접국, 특히 중국의 영향력이 큰 점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문화와 교육교류차원에서도 중국과 일본은 한류가 성행하는 중요한 나라들이며, 현재 한중일 세 나라에 있는 유학생 중 삼국의 비율이 제일 많은 것만을 보더라도 그 밀접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일부에선 인터넷을 통한 왜곡된 정보로 서로간 부정적 감정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한중일간의 교류는 앞으로 각 방면에서 더욱 빈번해 질 것이다.
4. 종교지형
2001년에 발표된 세계종교인구통계에 의하면, 세계 기독교 인구의 비율이 점진적으로 감소하고 있는데 반하여 오히려 이슬람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런 이슬람 인구의 점진적인 증가는 앞으로도 최소한 25년 동안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종교 인구별 기독교 인구의 비율감소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변화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대륙별 기독교 인구의 증감현황이다. 100년 전 기독교는 절대적으로 유럽인의 종교였다. 1900년을 기점으로 볼 때, 유럽 전체의 기독교인 숫자가 세계 기독교 인구 총 숫자의 약70%를 차지하고 있었다. 절대다수의 기독교인이 유럽인이었으며, 아시아인 기독교인의 숫자는 4%에 불과했다. 그러나 100년 전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유럽 기독교인의 비율은 2000년을 기점으로 볼 때 29%로 급격히 감소한 반면, 100년 전 미미한 숫자에 불과했던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세계 기독교인구의 약60%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비백인화’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될 전망이다.
그러면 동아시아의 상황은 어떠한가? 일본의 경우, 기독교인구가 별다른 변화 없이 늘 소수에 불과하지만,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 그 변화는 실로 극적이다. 먼저 한국의 경우를 보면, 2005년 인구조사통계 결과를 보면 아래와 같다.
(단위: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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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체 인구 |
47,041,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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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인구 |
10,726,463(22.8%) |
1995년 대비 405,000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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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구 |
8,616,438(18.3%) |
1995년 대비 144,000감소(-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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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인구 |
5,146,147(10.9%) |
1995년 대비2,195,000증가(+74.4%) |
출처: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 통계(2005년)
중국의 경우, 1997년 국가종교사무국에서 발표한 문건에는 천주교가 약 400만 명, 기독교가 약 1000만 명으로 파악되어 있는데, 2005년 발표에는 기독교가 약1600만 명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중국정부에서 발표한 통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예로 화동사범대학의 틍수쥔 교수와 류중위 교수가 2007년 2월7일자 차이나 데일리 신문(영문판)에 기고한 글에 보면 약4천5백 명의 설문조사를 토대로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정부발표보다 최소한 3배 이상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숫자 역시 이른바 삼자교회를 비롯한 도시에 거주하는 고학력층 신자들이고 농촌과 저학력층, 그리고 가정교회 신도수까지 포함한다면 약8000만 명가량 된다고 한다. 여기에 천주교 신자까지 합친다면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약1억3천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빈곤과 종교가 결부되어 있다는 마르크스 종교이론과는 달리 최근에는 경제적으로 발전한 연안지역 도시의 중산층이 신도가 되고 있다.
Ⅱ 2개의 지도 – 동아시아 선교학의 방향점 찾기
모르는 지역을 가려면 우리는 지도에 의지한다. 지도는 실제를 반영해서 작성되어 진다. 그러나 지도는 우리가 목적하는 바에 따라서 실제의 어떤 부분을 과장하기도 하고, 축소나 생략하기도 한다. 예컨대 지하철 노선도의 경우, 오직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타고 내릴 지하철역에 대한 경로이다. 오늘날 동아시아 선교, 특별히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미지의 땅 이북에 대하여 어떠한 ‘선교지도’를 그려야 할지 고민할 때, 필자는 두 개의 사상전통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예수회 선교신학, 다른 하나는 CMS의 선교이론이자 중국교회의 공식신학인 삼자신학이다. 전자가 동아시아 선교에 있어서 종축이라면, 후자는 횡축과도 같다고 하겠다.
1. 예수회 선교신학
1583년부터 시작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의 중국선교로 인해 기독교로 개종했던 초기 중국 기독교인들은 남경과 북경의 고급관리와 사대부가 주종을 이루었다. 특별히 이들 초기 중국 기독교 지도자 중, 서광계(徐光啓, 1562-1633), 이지조(李之藻, 1565-1630), 양정균(楊廷筠, 1562-1627) 세 사람은 중국에서 활동했던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중국선교개척의 세 대들보(開敎三大柱石)”로 불렸던 인물로 모두 고급 관리이거나 정통 사대부 반열에 드는 사람들이다. 이 세 명의 초기 중국 기독교 지도자 중 특별히 서광계는 명나라 조정의 직급서열이나 활동범위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명 왕조의 공식역사기록인 『明史』에 오랑캐의 종교를 신봉한 反 유교적 인물이란 평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대륙역사학계에서 명나라 말기 압제 당하던 농민들을 위하여 서양의 선진문물을 도입하여 식량증산이나 관개시설 보수 등의 공을 남긴 사회주의 운동가의 전형적인 모델로 추앙되는 등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명말청조 중국 지식인을 비롯한 중국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마테오 리치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과 이들의 영성적, 신학적 ‘지도’는 어떠한 모습이었나?
먼저, 영성적 지도를 살펴보자.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성적 지도의 원천은 설립자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에서 기원한다. 1521년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 온 이냐시오는 성인전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으며 회심의 여정에 들어선다. 그 후 그는 몬세라트(Montserrat)의 베네딕트 수도원과 만레사(Manresa)동굴에서의 명상과 신비체험을 통해 영성의 깊이를 더해 간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을 저술하는데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그는 만학도로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주변사람들에게 영신수련을 지도하였는데, 이로 인해 계몽파(Alumbrado) 이단이라는 혐의로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특별히 그가 신학수업을 받았던 파리대학의 몽테귀 대학(Collège de Montaigu)은 칼빈도 공부한 대학이었다. 거기서 그는 7명의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1534년 8월 15일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 소성당에서 새로운 수도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수도원과는 달리 활동(Ministry)과 영성(Spirituality)를 분리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 유대인들을 보살폈는데, 이러한 자신들의 영성을 ‘활동 속에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특징 때문에 기존 교회제도권으로부터 의심과 견제에 시달려야 했다. 왜냐하면, 베네딕트, 프란시스, 도미닉과 같은 전통적인 수도회들은 창립자의 이름을 딴 반면, 이냐시오는 그러한 관례를 깨고 ‘예수회(Society of Jesus)‘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또한 기존 수도원들이 중세 수도원 제도의 대표적 모델이었던 『베네딕트 수도회 규범』(The Rule of St. Benedict)에 따라서 자급자족 운영체계를 통한 지역정착주의와 바깥세상과 단절을 유지한 데 반해, 『예수회 회헌』은 예수회 소속 사제들의 사명을 “세상의 모든 곳을 향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살아가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Finding God in All Things)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영성에 근거하여 도시는 회피해야 할 죄인의 소굴이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무대였으며 선교지의 토착문화는 부정되어야 할 異敎의 신앙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가운데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는 선교의 접촉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아시아 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친 프란시스 사베에르(Francis Xavier)가 이냐시오의 편지를 읽거나 답장을 쓸 때 언제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썼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처럼 마태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에 강한 영향을 끼친 영성적 원천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신학적 지도를 살펴보자.
신대륙의 발견과 해양 항해술의 발달로 가속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축적은 기존의 세계관과 학문체계에 심각한 도전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중세유럽을 떠받쳐 오던 기독교 세계관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선교신학적 주제는 신대륙에서 발견된 ‘새로운 인류’가 과연 기독교 복음을 수용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라틴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Knowledge of God)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현장의 선교사뿐만 아니라, 선교사와 식민개척자를 동시에 파견했던 스페인 정부와 교회에게도 심각한 신학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고민거리였다. 이런 근본적인 선교학적 질문들이 스페인을 비롯한 남부유럽의 대학에서 제기되면서, 기존의 신학체계와 고전 텍스트들은 부적절한 내용으로 밝혀지거나,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명문인 살라망카 대학은 바로 이러한 재해석 작업을 주도한 곳으로서 그 중 ‘Christian Socrates’라는 별명이 붙은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인 Francisco de Vitoria(1486-1546)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Thomas Aquinas의 『이교도대전』(Summa contra Gentilis)를 재해석하여 인디언들은 유럽인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아는 지식인 제1본성(Prima Praecepta)을 소유하고 있다고 봤다. 그는 인디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제2본성(Secund Praecepta)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며, 만일 그들이 교육과 주거환경이 개선되고 미신에 물들어 있는 무지몽매를 깨우치기만 한다면 그들도 유럽인들처럼 문명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라틴 아메리카 선교보고를 통해 새롭게 재해석된 살라망카 대학의 제2토미즘이 16세기 후반에 예수회 대학의 모체로 알려진 로마대학(Collegio Romano)에 소개되면서 예수회의 핵심적인 신학기조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토마스 아퀴나스 해석은 마테오 리치나 Roberto de Nobili(1577-1656)와 같은 초기 예수회 선교사에게 혁신적인 선교신학적 패러다임을 제공했다. 1583년 중국본토로 입국한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의 본성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제1본성이 이미 고대유교의 절대신이었던 上帝에 대한 믿음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주장하면서 “기독교의 Deus와 유교의 上帝는 이름만 다를 뿐(歷觀古書 而知上帝與天主特異以名也)”이라는 혁신적인 선교이론을 펼쳤다.
이처럼 선교현장의 난제들이 신학의 재검토를 유도하고, 이런 ‘신학적 반성(Theological Reflection)’을 통해 새롭게 정립되어 다시 현장에 적용되는 순환과정을 확인하면서 예수회 선교는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2. 三自신학
삼자란 자치, 자전, 자양을 의미하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 중국기독교의 기본원칙이다. 이것은 1950년 5월 2일 기독교대표들과 周恩來 총리와 3차례의 걸친 회담 후, 吳耀宗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선언>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선언은 기독교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청산하고 자치, 자전, 자양의 원칙하에 교회를 쇄신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丁光訓은 기독교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계속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교회내적 요인으로서 기독교인 스스로가 발기한 삼자애국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외적 요인으로서 求同存異이라는 통일전선정책에 근거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종교신앙자유정책이다.
이러한 중국기독교의 원칙이자 중국의 종교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삼자원리는 사실 성공회의 교회와 선교역사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841년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 Society) 총무에 임명된 Henry Venn(1796-1873)은 1850년 <원주민 교회조직>이라는 책을 통하여 ‘선교회의 종말’(Euthanasia of mission)이라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그는 선교사가 할 일은 自治, 自傳, 自養의 원칙하에 교회가 서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삼자원칙은 사도 바울의 선교원칙을 모델로 삼고 있다.
이와같이 헨리 벤이 주장한 자치, 자전, 자양이라는 선교신학은 역사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교회의 탄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유럽에 있어서 민족의식의 성립은 종교개혁을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교왕국(Christendom)의 정신적 지주인 가톨릭시즘이라는 보편주의가 全 유럽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십자군전쟁, 페스트의 창궐, 활자와 항해술의 발달 등은 더 이상 획일적 질서에 대한 정당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그러한 시대배경 하에 기존의 종교적 사고와 언어체계를 가지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은 근세민족주의 여명이자 근대 사상체계의 맹아였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 영국교회는 보편교회의 현실적 힘인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自治를 주장하였고,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캘빈주의자로들로부터 自傳-예컨대, 공도문-을 내세워 영국교회의 전통을 수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공회의 태도인 Via Media라는 自養이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이처럼 중국교회와 성공회신학은 특별히 교회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먼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중국교회와 영국교회는 서로 각자 처한 상황이 달랐지만, 민족주의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즉, 종교개혁 시기 독일이나 그 밖의 나라처럼 영국교회 역시 로마교회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고 자치적인 교회를 세웠다면, 중국교회는 삼자운동을 통하여 서구교회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중국인에 의해 운영되는 자치적인 교회를 세운 것이다.
둘째,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중국교회는 자신의 교회를 찾는 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지도’가 필요하였다. 성공회의 선교신학, 특별히 삼자원칙은 이러한 중국교회에 하나의 선교지도를 제공하였다.
셋째,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성공회가 지니고 있는 포용성 원리는 교회와 국가 간에 그리고 교회 내 다양한 교파와 신학적 차이점을 조화시키는 원리를 지니고 있다.
Ⅲ 하나의 꿈 – 대동을 위한 실천적 과제
동아시아 성공회의 선교적 방향점을 찾기위해 필자는 4개의 지형-기억의 지형, 정치의 지형, 경제와 문화의 지형, 종교의 지형-을 살펴보고 2개의 지도-예수회의 선교신학, 성공회와 중국교회의 삼자신학-를 그려봤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틀을 가지고 급변하는 21세기에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가? 필자는 다음 세 가지 점을 고려하면서 실천하길 제안해 본다.
첫째, 상호이해하기이다. 성공회는 천주교처럼 중앙집권적 원리를 추구하지도, 장로교처럼 개별화 원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성공회는 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적 공교회간의 ‘연합(coali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용적 조직체계가 좀 더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교회간에 상호이해를 위한 보다 긴밀한 관계를 다져야 하겠다. Crossing Boundaries! 각자의 구조안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상대교회를, 상대지역을, 나아가 성공회 밖에 존재하는 교회와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둘째, 연결고리 찾기이다. 상호이해과정은 상호간에 연대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는 과정으로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자신의 현실적 역량에 대한 분석을 하여야 한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 다양한 연대의 가능성 중에서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고 거기에 연대의 힘을 모으는 것이 필요하겠다.
셋째, 하나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이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고 치자. 두 사람은 사랑스러운 눈으로 서로 상대방을 쳐다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어떤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두 사람을 엮어줄 아이일 수도 있고, 삶의 목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함께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읽는 것은 미래의 희망을 향해 함께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커다란 하나(大同)’가 점차 되어갈 것이다.
서로 다르고 상처난 기억이 大同이 되고, 서로 다르고 갈등하는 정치지형이 大同이 되고, 서로 다르고 반목하는 종교지형이 大同이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동아시아 성공회의 역사적 응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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