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0:24-39) 이기찬 이삭 신부 / 부여기도소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두려움을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제자로서 스승만해진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며 그동안의 잘못된 삶의 방향과 마음을 돌이키고,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 뜻대로 살면서 옳은 일을 하다가 해를 당하는 이들에게 오늘의 말씀은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안한 제자들에게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함께하십니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박해자들이 아무리 하느님 뜻을 따르는 우리를 괴롭힌다 해도 그 고통은 하느님의 심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또 우리의 몸은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영원하다. 두려워하지 마라!”, 더욱 친절히 알기 쉽게 비유로도 말씀하십니다. “참새의 생명도 하느님께서 책임지시는데 하느님 형상을 입은 우리를 내버려두실 리가 없다.”, “00000 00!”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감히 어느 누구도 하찮게 평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뜻을 따르면서 인내하고, 그 뜻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헤아려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불과 70여 년 전 일본의 야만스런 행위와 그들이 웃으며 남긴 잔인하고 악독한 살육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인내란 말을 쉽게 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결단코 우리를 멸망 중에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핍박 중에 죽는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의義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죽음까지도 하느님을 믿는 믿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하느님 정의正義의 역사는 오늘 이 시간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형태로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머리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른 예수님을 인정한다 해도, 내가 지금 발 딛고 사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不義를 알게 됐음에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엔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靈과 함께 일상생활에서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 노력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고백하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傳道아닐까요? 만일 공개적인 신앙고백이 부담스럽기만 해서 표현을 하지 못한다면, 불의를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세례 때의 다짐과 예수님을 부인하기만 하면 당장은 편할 수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되면,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솔직히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주主로 여기지도 않고, 가르침에도 순종하지 않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느님께 지켜야 할 약속과 의무보다는 세속적인 관심과 이익을 더 중요시하게 되고, 하늘의 신령한 것보다는 지상에서의 일시적인 가치를 더 중요시 여기고 하느님과의 교제를 단절한 채, 또다시 죄의 종살이를 하며 세속적인 인간관계를 더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집 주인(예수님)을 가리켜 베엘제불(귀신의 왕, 교만의 왕)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그 집 식구들(제자들)에게 무슨 욕인들 못하겠습니까. 매주 우리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악행과 악습을 막으시고 진리와 정의를 지켜주시길 기도하지만, 정작 그들은 급기야 하느님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 식민 지배를 받게 된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비뚤어진 역사인식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도 욕하는데 국민에게야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본질적(하느님과 인간의 화목和睦, 요일 4:10)이고 내적인 평화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야기되는 영향력과 결과들 중의 하나가 불의한 악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죄악된 질서를 바로잡고 그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반면 세상의 불의는 하느님의 바른 질서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기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치열한 싸움은 불가피합니다(요14:27,16:33).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사람들과의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생길 것을 알려주셨고, 자연적인 성품에서 나오는 혈연적 사랑보다도 당신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가족사랑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를 위해 더 큰 틀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자된 자로서의 의무요, 본분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형 도구로써 로마의 통치를 반대했던 이들을 무수히 사형했었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란 대단히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를 때는 이런 시련까지도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이는 곧 자기 부정否定에 대한 실제적인 요구인 것입니다. 최소한 예수님은, 적어도 당신께서는, 곧 지게 되실 십자가를 생각하시면서 오늘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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